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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다/한국사

[공무원 한국사] 양란과 조선의 후기 정치 || 기출 및 포인트 정리

최명길과 김상헌, 주화파와 주전론의 대립은 성리학의 계보와 실학 사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현재의 외교관계를 바라볼 때에도 항상 언급되는 역사적 인물들.

추후 자세한 해설 추가 예정~!

개인적인 복습용 노트입니다.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인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지엽적으로 출제될 수 있는 부분, 예상 키워드, 고난도 포인트 등을 정리하는 글입니다.
시대에 따라 우선 정리한 뒤, 문화사 혹은 지역사 등 특정 문제 유형에 따라 부가적으로 정리할 예정입니다.


외국과의 관계 - 명 및 일본

 

① ② ③ 모두 중요한 선지이다. 조선 건국 초기의 대명 관계에 대해서도 문제가 나오기에...
명에 대한 사대 외교를 중심으로 밀고 나갔지만, 명과의 관계가 항상 좋은 건 아니었다.

 


조천사, 연행사라는 단어가 낯설어도 한자 풀이를 해 보면 이해가 가능할 수도...


쓰시마 섬 정벌 세종 1419 이종무 *고려 말기의 박위의 쓰시마 섬 정벌과 구분
삼포개항 세종 1426 동래(부산), 울산, 창원
계해약조 (삼포개항과 다름!!!) 세종 1443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
삼포왜란 중종 1510 3포 폐쇄, 비변사 설치
임신약조 중종 1512 세견선 25척, 세사미두 100석 (1/2로 축소)
사량진왜변  중종 1544  
정미약조 명종 1547 세견선 25척
을묘왜변 명종 1555 비변사 상설기구화, 제승방략 체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통신사 파견 기유약조 기유약조는 광해군 1609  

'답이 없는 문제'

위에서 삼포개항과 계해약조가 다르다고 한 것은 이 문제 때문!
ㄴ. 을 보면... '계해약조에 의해 삼포를 열었다'라고 서술했는데, 삼포개항이 먼저임 ㅡㅡ ㅋㅋㅋ 다른 내용!

 


① 고려의 박위, 조선의 이종무! 헷갈리지 말자~.

② 임신약조니, 정미약조니... 이름이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


이거 중요. 에도 막부에서 먼저 국교 재개 요청을 한 것!


저 '정한론'은 가끔 근현대사에서도 심심찮게 문제 소재가 되는 것 같음. 주의~
(임진왜란 전의 '정명가도'와 구분)


왜란

이 순서! 기본적이고 한국사 상식에 가깝다 해도 연달아 나오면 정말 헷갈린다.

임진왜란 발발
부산 전투 
상주 전투 
충주 탄금대 전투 - 신립 
선조의 의주파천, 한양 함락 
옥포 해전, 사천 해전, 당포 해전 
한산도 대첩 
진주대첩 - 김시민
평양성 탈환
파주 벽제관 전투 (명의 패배)
행주대첩
진주 혈전 - 논개
선조의 한양 복귀 
휴전 - 속오군 개편 - 이몽학의 난 
정유재란
칠천량 해전 - 원균 
명량 해전
노량 해전 



너무 유명한 한산도대첩, 명량해전 등 외에도 지엽적으로는...

  • 탄금대 전투
  • 의주파천 - 신립의 탄금대 전투 패배 이후
  • 사천해전 (처음으로 거북선 사용)
  • 논개의 희생 (2차 진주성 전투)
  • 훈련도감 설치 - 휴전 시기
  • 이몽학의 난 - 휴전 시기
  • 칠천량해전 - 원균

... 이 사이에 나올 수도 있다. 

ㄹ과 ㄱ의 경우 원균이 전투 말아먹은 뒤(...)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충무공의 마지막 혈전,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을 생각하면 된다.
ㄹ-ㄱ이 맨 끝에 오는 건 쉽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2번과 4번 중 어떤 걸 골라야 하나~

ㄷ. 행주대첩으로 큰 승리를 거둔 조-명 연합군, 특히 행주대첩은 민중의 참여로도 유명...
승리를 거둔 뒤에 선조가 한양으로 복귀하는 것이 적절하다.


평양성 탈환 - 벽제관 전투 대패 - 행주대첩 - 진주 혈전(논개) - 선조 한양 복귀 - 강화 협상


충무공의 불후의 어록인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를 안다면 명량해전인 건 쉽게 알 수 있긴 하지만,
다른 해전 역시 이순신의 해전이므로 헷갈릴 수 있긴 하다. 해전의 특징도 잘 기억하기.

2번 선지가 조금 난해한데, 임진왜란 3대첩과 이순신의 3대첩은 다름.

 

문제의 답은 ④ 이지만... ⑤도 잘 알아두자. <척경입비도> - 조선 후기의 작품


광해군의 정치와 인조반정

 

인조반정에 관한 선지! 


호란

 

정묘호란 - 강화도 피난, 후금의 침입, 형제의 맹약 강요, 정봉수와 이립

병자호란 - 남한산성 피난, 의 침입, 군신 관계 강요, 임경업 장군

국호가 다르고, 피신 과정도 다르고, 강요한 내용 역시 다르니 잘 구분해야 함 


구분 못하면 2번을 고르는 참사가 발생할 수도 있음.
자료를 보면 '남한산성'에서 최후 항전이 이뤄진 걸 보아 병자호란.


메시지와 이념이 비슷한 주전론과 북벌론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

광해군의 중립 외교 - 인조 반정 - 정묘호란 - 주화론과 주전론 - 병자호란 - 북벌론 - 윤휴와 허적

서인들이 북벌을 파기한 이후 북벌론은 윤휴(尹鑴)·허적(許積) 등 남인들에 의해 명맥이 이어졌다. 효종대 남인들중 가장 강경한 북벌론자였던 윤휴는 서인들에 의해 파기된 북벌론을 계속 고수하였고 현종말·숙종초에는 북벌론을 강력하게 주창하였다.
1674년(현종 15) 효종비 인선왕후상을 계기로 갑인예송이 일어났는데 앞서 기해예송에서와 달리 이번에는 윤휴와 허목의 예설을 앞세운 남인의 예설이 승리하여 남인 위주의 정국이 구성되었다. 이렇게 남인이 우세한 정국 하에서 윤휴는 남인 예설의 주창자로서 현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평소의 지론인 북벌론을 거리낌 없이 주장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청이 삼번(三蕃)의 난과 정금(鄭錦)의 난으로 위기에 봉착해 있었던 점도 북벌론 제기의 유력한 배경이 되었다. 이때 윤휴는 현종에게 비밀상소를 올려 효종의 유업 계승을 주청하였다.
이때 급작스럽게 현종이 사망하고 숙종이 즉위하게 되는데 윤휴는 신왕에게 다시 한 번 북벌을 주장한다. 곧 1675년(숙종 원년) 성균관 사업 윤휴는 ‘우리나라에는 10만 정병이 있고 식량도 쉽게 마련할 수 있으므로 열흘이 못 되어 심양을 차지할 수 있고 심양을 빼앗고 나면 관내(關內)가 진동할 것이니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염려가 없다’고 하였다.
숙종의 즉위와 함께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윤휴의 북벌론에도 힘이 실리게 되었다. 그는 특히 북벌을 위한 병거(兵車) 제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북벌을 주관할 군영으로서 도체찰사부의 설치, 산성 수축, 무과 합격자의 증원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북벌론은 현종이나 숙종은 물론 남인들조차도 어려워하였다. 청 내부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할지라도 크게 보면 청조는 안정기로 접어들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북벌론은 비현실적이고 극히 위험천만한 주장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윤휴를 지지하던 허적 조차도 ‘신은 윤휴와 견해가 다르니 윤휴는 바로 중원으로 쳐들어가려고 하고 신은 비밀히 준비하여 때를 기다리고자 한다. 누가 명을 위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만 시세로 보아 불가하다’며 북벌 반대론으로 돌아섰고 숙종도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즉 인조 당시의 주전론과, 효종 당시의 북벌론은 구분이 필요한 개념임! ④ 
선지 자체는 '전쟁의 치욕을 벗기 위함'이므로, 효종인 것은 바로 알 수 있지만...

 


군사 제도의 정비

임진왜란 이후로 ... 

중앙군은 훈련도감과 5군영, 지방군은 영진군 -> 속오군 체제로 변화!
조선의 군 편제는 다른 시대와 엮어서 내기도 좋고, 단독 출제도 종종 되므로 꼭 주의!

특히 훈련도감은 지문의 내용처럼 '삼수미'를 거두어 병졸들의 식사를 충당했는데... 형편이 좋지 못해서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안타까운 일...

*지문의 사료 <만기요람>은 순조 대의 저서이다. 출제된 적은 없는데 혹시 모르니~.


후기의 정치사

 

광해군

 

덕수궁 → 임진왜란 이후 정궁이 되어, 광해군이 경운궁으로 승격,
순종 즉위후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호칭 변경
참고로 이 덕수궁은, 본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었음.

 

폐모살제!

 

<동의보감>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 - 승정원일기 전소 ...
그래서 승정원일기는 인조 이후만 현존
선조실록은 '수정선조실록'의 형태로 다시 저술
왜란 이후로 실록 보관 사고가 묘향산, 마니산 등으로 옮겨짐.

 


인조

 

인조 반정 - 이괄의 난 

+ 벨테브레 (박연)의 홍이포
+ 삼학사 납치
+ 소현세자의 청 문물 

인조의 최초 상평통보 주조, 숙종의 전국 유통 ... 구분이 필요!


효종 (봉림대군)

 

영고탑 파견과 나선 정벌, 하멜과 조총부대, 설점수세제, 시헌력 사용 등이 키워드!


현종과 숙종

이 흐름을 모르면 환국 문제 자체를 풀 수가 없음~ ㅜ.ㅜ

동인의 분화 - 남인과 북인의 갈등은 '정여립 모반사건과 건저의 사건'으로 인한 것!

특히 현종 대의 '기해예송' '갑인예송'

숙종 대의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의 명칭은 반드시 암기!!!


저기서 말하는 동인과 서인의 분화는, 보수적인 성격과 진보적인 성격으로 나뉘면 좀 이해가 쉽다.
분화 당시에는 동인은 혁신적, 진보적인 경향 || 서인은 보수적인 경향이 있었음.
다만 서인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이'의 경우에는 당시로서는 좀 혁신적인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 점이랑 헷갈리지 말자.
(학문적인 정설이 아니라 그냥 이해를 위해 ^^;)

이후 나오는 주화파와 주전론, 북학파와 북벌론,
서인과 남인, 낙론과 호론 등등도 진보 대 보수로 나누면 이해가 쉽다.


이 문제는 선조 대부터 광해군 대까지 모두 통달하는 문제인데...
특히 ㄹ. 북인의 경우 '회퇴변척'을 단서로 달았는데, 이건 회암 선생과 퇴계 선생을 배척한다는 의미.
북인의 영수인 조식 선생만을 좇았는데, 이게 반감을 사서 북인 실각 후 조식은 성리학계에서 조인트를 많이 까임...
* 이 점을 응용해 조식 선생이 배향되지 않은 점도 문제로 출제된 적이 있음. 워낙 지엽적인 문제...

* ③ 송시열의 북벌론은 효종, 숙종! 


1번 선지의 경우 기해예송, 갑인예송 모두 '1년상'을 기억하면 된다. '1년'은 기년이라고도 함.
즉 두 예송 모두 결론은 기년상을 지내는 것으로...

다만 1차 기해예송의 경우, 사대부의 예법을 적용한 것이고 (서인 주장) (천하동례)
2차 갑인예송의 경우, 왕실의 예법을 적용한 것이다 (남인 주장) (왕자례부동사례) - 남인의 집권

천하동례 왕자례부동사례가 먼데 10덕아 ㅡㅡ;를 한다면 한문풀이를 잘 하면 된다.
천하의 예법을 모두 같다 - 사대부나 왕실이나~ 동일한 예법을 적용하자 (서인)
왕실의 예는 부동不同, 즉 사대부의 예법과 다르다 ~ 왕실 예법이 따로 있다 (남인)


1차 환국, 경신 환국 당시에는 윤휴와 허적이 처형을 당했다.
2차 환국, 즉 기사 환국 때에는 송시열이 처형당했지만
3차 환국인 갑술 환국 당시 송시열의 명예 회복 (제사도 지내고...) - 이 당시 희빈 장씨 사사, 인현왕후 복위


 

효종대왕을 서자처럼 여겼다는 말로 보아, 사대부의 예법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음

송시열은 서인의 대표 영수!
②의 기사환국은, 2차 환국인데, 이때 송시열이 처형됐으므로
당연히 서인이 아니라 남인이 집권했다고 볼 수 있다. 
지문 역시 '기해년' '효종대왕을 서자처럼 여겨(차남)' 으로부터 서인의 주장에 대해 남인이 비판하는 것.


서계라는 것이 메이지 유신 이후 운요호 사건의 배경이 된 것만 생각을 했는데,
서계는 외교 문서를 총칭하는 표현.
따라서 구한말에만 한정된 표현이 아님... 4번 주의! 나는 답을 1번으로 골랐었다 ㅋㅋㅋ


★ 숙종 보너스 업적 

안 나올 것 같아도 다 나왔으니 정리한 거임.

단종 복위(노산군 → 단종 시호)

전국 양전 사업 실시와 폐사군의 복설

현충사


대보단


만동묘 


★ 경종 & 영조와 정조

 

경종은 워낙 몸이 약해서... 경종 대에는 신임 사화 (노론 세력 약화),
영조 대에는 이인좌의 난 (소론의 약화)

신축옥사
경종은 몸이 허약하고 아들이 없었다. 이에 노론이 경종에게 왕세제 책봉을 주장함에 따라 1721년(경종 1년) 왕제(王弟) 연잉군(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으며, 더 나아가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의 노론 4대신은 경종의 병을 이유로 왕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주장하였고 경종이 이를 승인하였다.
이에 소론파의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煇) 등이 부당성을 상소함에 따라 대리청정이 취소되었으며, 이 문제를 노론의 경종에 대한 불충으로 몰아 노론을 탄핵하였고, 이후 목호룡(睦虎龍)이 고변사건(告變事件)을 일으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의 4대신인 이이명·김창집·이건명·조태채 등이 차례로 사형을 당했다.

임인옥사
소론의 김일경·목호룡 등이 1722년(경종 2년) 음력 3월 임금을 죽이려는 역적이 있으며, 목호룡은 그 역적이 정인중(鄭麟重)·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백망(白望)·이홍술(李弘述)·심상길(沈尙吉)·이희지(李喜之)·이명좌(李明佐)·김성행(金省行)·이세복(李世福) 등 60여 명이라 고하였다.
이에 임금은 즉시 정국(庭鞠)을 열고 목호룡이 지목한 모두를 잡아들였다. 이 중 백망은 심문 도중 세력을 잃은 소론이 왕세제 연잉군을 모함하려고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심문을 담당한 소론이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홍술·이천기·이희지·심상길·정인중·김용택·백망·장세상(張世相)·홍의인(洪義人)·이명좌 등이 이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이처럼 신임사화도 종종 출제된다!


희빈 장씨 소생의 왕자 - 경종을 의미한다. 
연잉군 - 훗날의 영조

노론 - No론으로 해서 기억하자. 희빈 장씨 소생을 원자로 삼는 것에 No한다!
노론은 위에서 말한 보수 대 진보로 생각해 보면 좀 보수적인 편.

 

* 이때 소론의 정치적 입지가 약해진 것을 배경으로 하여 정제두와 같은 양명학자가 나타난 것.


 

이인좌의 난! 그리고 3번 선지와 5번 선지 구분 주의.
영조의 탕평과 정조의 탕평은 매우 다름.
영조 탕평 - 완론 중심
정조 탕평 - 준론 중심, 옳고 그름을 밝히는 정치 


영조는 준천사,
정조는 주교사 (다리 건설)

*자주 나오는 낚시인데, ㄷ. 균역법은 양반에게 군포를 부과하게 한 것이 아님~


 

'무원록' 시리즈는 법의학서.

<신주무원록> - 세종

<증수무원록> - 영조

<증수무원록언해본> - 정조


달은 태극이요, 그 태극은 바로 나다. (만천명월주인옹) - 정조


처음 풀 때 당황했던 문제... 토목 사업 및 신도시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정조를 생각하면,
대유둔전이라는 국영 농장도 생각할 수 있다.


참고로 4번 선지 굉장히 주의해야 함. 저기 설명에 있듯이 '중국에서 편찬한 서적을 수입한 것'


이렇게 1번 선지로 낚시를 함 ㅋㅋㅋㅋ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온 서적을, '편찬했다'라고 저술해서 낚시!


<무예도보통지> 역시 정조 대의 서적


지문이 정조인 건 알겠는데... 선택지 중 ㄷ. ㄹ.을 처음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수성윤음 - 영조
한구자와 정리자
- 잘 알려지지 않은 정조 대의 사실이다. 


수성윤음은 언제든지 재출제 될 수 있음!

수성윤음의 반포, 수도 방어 체계 강화 - 영조
장용영의 설치, 4 유수부 체제 - 정조 


조선 전기의 세종, 성종과 마찬가지로 영조와 정조 역시 서적 등을 키워드로 출제하는 경우가 많다.
『자휼전칙』 역시 정조 대. 

'자휼'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구휼 방법을 정리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규장각에 관한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