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엽적으로 출제될 수 있는 부분, 예상 키워드, 고난도 포인트 등을 정리하는 글입니다. 시대에 따라 우선 정리한 뒤, 문화사 혹은 지역사 등 특정 문제 유형에 따라 부가적으로 정리할 예정입니다.
삼국시대는 일단 나라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나라가 공존하고 있으므로 각 나라들의 정치적 관계 및 세력 변화를 잘 파악하기!
특히 X왕이 재위할 때 Y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A와 B 사이 시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공시적, 통시적으로 묻는 경우가 매우 많아서 꼼꼼하게 공부해야 한다. 복습을 꾸준히 해도 정신 놓으면 헷갈릴 때가 많음...
삼국시대의 정치와 국가 간의 관계
좌측 가) '이사금' 칭호를 쓴 왕은 '파사 이사금'이 대표적인데, 파사 이사금이 출제된 건 계리직 9급 외에는 없다... 너무 신경 ㄴㄴ
좌측 나) 마립간 칭호의 경우 '눌지 마립간', '소지 마립간'이 중요한데,
내물 마립간 - 형제 상속제, 전진과의 교류
눌지 마립간 - 부자 상속제, 복호를 이용한 정치 전략
소지 마립간 - 행정적 6부 설치, 우역 설치, 시사(시장) 설치, 신궁 설치
소지마립간 때 국가 체제 정비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주목되는 점은 신궁(神宮)의 설치이다. 원래 신라에는 시조묘(始祖廟)가 있어서, 새로 왕이 즉위하면 시조묘에 배알하는 것이 일종의 즉위의례였다. 시조묘에는 물론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가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487년(소지마립간 9)에 시조의 탄강지인 나을(奈乙)에 신궁을 설치했다. 신궁에 모신 ‘시조’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지만, 김씨의 시조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다수이다. 이것은 신라가 마립간 시기에 김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을 이룬 것과 관련이 있다. 즉, 김씨 왕족을 신격화함으로써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높이고자 한 것이다. 이로써 신라에서는 시조묘제사와 신궁제사라는 이원적인 제사체계가 성립하게 된다. 소지마립간은 신궁 설치에 이어 같은 해 3월,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관도(官道)를 수리하였다. 우역이란 공문서 전달이나 관물의 운송, 관리에게 숙박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한 일종의 교통·통신시설이다. 이러한 우역을 설치하고, 더불어 관도를 수리했다는 것은 중앙과 지방의 원활한 연결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이다. 즉, 중앙의 명령이 지방까지 신속하게 전달되고, 역으로 지방의 일은 중앙으로 신속히 보고될 수 있도록 전달체계를 정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치들은 신라의 지방통치와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관도의 정비는 신라가 지방관을 파견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문헌상 도사(道使)가 파견된 첫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활발히 이루어지는 축성사업에 지방민이 동원되는 것을 보면, 중앙의 지배력이 지방까지 직접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지마립간은 지방에 대한 통치 방식을 직접지배로 전환해 감으로써, 왕권의 강화와 함께 중앙집권화를 추진한 것이다. 우역과 관도의 정비는 지방통치 뿐만 아니라 물자의 유통과도 관련이 있다. 앞서 눌지마립간은 사람들에게 우차(牛車)의 사용법을 알려주어 물자 수송을 편리하게 하였다. 운송 수단으로 소를 사용할 정도로 물자의 유통량이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469년(자비마립간 12)에는 수도의 행정구역인 방리(坊里)의 이름을 새로 정하였다. 그만큼 수도의 인구가 증가하고, 규모가 확장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소비시장이 확대되고 물자의 유통량이 증가하자, 490년(소지마립간 12) 3월, 처음으로 수도에 시장을 개설해 사방의 재화를 유통시키기에 이른다. 때마침 정비된 우역과 관도의 정비는 중앙과 지방의 물자 유통 증가에도 기여했을 것이다. 이처럼 소지마립간 시기에는 상업과 운송의 발전도 두드러졌다.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소지마립간은 민생의 안정에도 힘을 썼다. 수도에 가뭄이 들자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눠주고, 홍수가 나자 지방을 돌며 백성들을 위문했다. 소지마립간 대에는 가뭄과 홍수, 우박과 전염병 등 각종 재해가 빈번했다. 그러자 자신이 먹는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죄수의 정상을 살펴 잘못된 정치가 없는지 스스로 돌아보았다. 또한 놀고먹는 백성들이 농사일로 돌아가도록 하여 유랑민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을 예방하고, 직접 교외로 나가 농사를 시찰하기도 했다. 특히 왕이 직접 농사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농업생산력의 증대에도 기여했다. 이처럼 소지마립간은 직접 현장을 돌며 민생을 돌보았고, 백성들에게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당시 사람들은 소지마립간을 성인(聖人)이라 칭송하였다.
출처 - 우리역사넷
동옥저, 동부여, 동예, 부여... '동-'이 붙고, 부여는 또 무슨 부분으로 나뉘고... 이것 때문에 정복사가 좀 복잡할 수 있다.
동옥저 - 태조왕 동부여와 동예 - 광개토대왕 부여 복속 - 문자왕 (최대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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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 - 부족적 5부 고국천왕 - 행정적 5부 개편
문자왕의 부여 복속 이외에도, 영양왕의 요서 공략, 영류왕과 연개소문, 고구려의 멸망... 이 부분도 종종 출제되니까 주의!
종이와 먹 제작법 전파 - 역시 영양왕 대의 사실!
ㄹ. 나-제 동맹에 있어서, 비유왕의 동맹과 동성왕의 동맹은 구분해야 한다. 혼인을 통한, 즉 결혼동맹은 동성왕 대의 사실!
문제는 근초고왕을 묻고 있지만... 중국과의 관계도 잘 정리해야 이해가 쉽다.
이 문제는 특히 주의!!!!
문제를 잘 읽는 건 항상 시험의 핵심! 이지만 ... 놓치는 경우가 빈번하다. 꼭 잘 읽자.
'비석을 세운' 이 핵심 ... 따라서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운 인물은 당연 장수왕이므로, 2번을 고르면 큰일날 노릇이다.
ㄱ. 경주 호우총을 말하는 것. ㄷ. 가야도 종종 출제되는데, '포상8국의 난'은 학계 논란이 많지만 종종 언급됨...
절대 하면 안되는 실수지만 설마는 설마니까...
[1] [4] 22담로와 22부는 헷갈리면 안됨! ㅋㅋㅋ
이것두 무령왕 문제인데... 혹시나 저 밑의 22담로가 언급되지 않는다면?!
너무 극단적인 가정인가 하하... 다만 우측의 <양직공도>는 알아 두는 게 좋다!
가장 헷갈리는 왕의 재위 시기!
불교를 가장 먼저 공인한 쪽은 소수림왕, 그 다음은 백제의 침류왕! 소수림왕과 침류왕이 항상 헷갈리기 쉽다. 신라의 경우 눌지 마립간 당시 묵호자가 불교 전래 - 법흥왕 대에 공인
지증왕의 경우 '아시촌 소경을 설치했다' 업적도 종종 출제되니 주의!
+ 상복법의 제정 , 실직주, 주군현
[4]의 '우역'은 소지 마립간. 소지 마립간 역시 자주 볼 수 있으니 주의한다. 소지마립간의 업적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나을에 신궁을 설치했다'도 기억하기!
ㄹ. <신집>은 고구려 영양왕! 진흥왕 대의 거칠부의 <국사>와 헷갈리믄 안됨! ㅋㅋㅋ
관산성 공격이 아니라 생소하게 '신주를 설치했다'만 언급된다면? 신주 설치는 진흥왕의 업적이다. 나-제 동맹을 깨트리고, 백제를 배신한 뒤 한강 유역을 정복한 것 이에 분노한 성왕이 관산성을 공격한 셈!
가야 연맹
보통 가야 하면 떠오르는 '금관가야'가 아니라 '대가야'가 출제된 특이 케이스 자료에서 언급된 '이진아시왕'을 잘 기억해야 한다.
이 문제 역시 대가야가 출제되었는데, [2] '우륵'을 잘 기억하자!
우선, 금관가야와 대가야는 반드시 구분하기! 다른 나라이다. 금관가야는 김해, 대가야는 고령 지역 중심. 건국설화 역시 좀 다르다. 대가야의 경우 '이진아시왕'이 언급된다.
위에서도 언급한 문제이지만, 여기서 'ㄷ'이 중요. 포상팔국의 난은 학계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기는 하지만... 이 난을 신라의 도움을 받아 진압한 뒤, 가야 연맹의 중심이 금관가야가 됐다는 점만 알면 될 것 같다.
신라의 도움을 받아 진압했다는 점은 이 문제에서도 활용됐다. ㄹ. 선지의 경우, 백제와 일본 간의 관계는 너무 유명~.
다만 광개토대왕의 신라 원조로 간접적으로 탈탈 털린 뒤 금관가야 중심 연맹이 해체되고, 대가야 중심의 연맹으로 재편, 여기에 뒤이어 법흥왕 당시 가야의 왕 '김구해'가 항복해 금관가야 멸망했다는 것까지 알자. 한편, 이 당시 대가야의 경우 대가야의 왕 '이뇌왕'이 법흥왕과 결혼 동맹을 맺은 것도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