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배우다/한국사

[공무원 한국사] 삼국통일과 통일신라 || 기출 및 포인트 정리

추후 자세한 해설 추가 예정~!



개인적인 복습용 노트입니다.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인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지엽적으로 출제될 수 있는 부분, 예상 키워드, 고난도 포인트 등을 정리하는 글입니다.
시대에 따라 우선 정리한 뒤, 문화사 혹은 지역사 등 특정 문제 유형에 따라 부가적으로 정리할 예정입니다.


특히 나라가 망하고, 나라가 새로 생기는 시점이 순서가 복잡해 문제로 내기 아주 좋은데...
삼국시대도 예외는 아님.

이외에도 나말여초, 여말선초, 임진왜란, 독립전쟁, 한국전쟁 등 순서 뒤섞기 좋은 부분이 너무 많아...

연도는 외우지 않아도 풀 수 있지만,
정신건강상 외우는 것이 좋은 파트도 있는데... 바로 이 파트라고 생각함.
642, 대야성 전투 || 645, 안시성 싸움 || 660, 백제 멸망 등


 

다양한 요점이 있어서 공부하기 좋은 문제라고 생각함.

영양왕 당시 고구려의 요서 선빵 공격 (with 말갈족) - 살수대첩과 을지문덕, 여수장우중문시 (아래)

을지문덕이 사실 비꼬는 시임

수 멸망 이후 건국 - 당을 수비하기 위한 천리장성 축조 시작 - 연개소문의 정변과 영류왕 살해, 보장왕 옹립
연개소문은 대막리지 자처 
당과의 전투 - 안시성 싸움...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 이후로 재침입 

이미지에 있듯, 642년에 대야성 전투 (백제와 신라) - 당시 선덕여왕 재위, '김품석' 사망
선덕여왕은 고구려에 원조를 구했지만 영토 문제로 결렬 
이후 당과의 동맹 결성 (이 때 진덕여왕 당시 보낸 것이 바로 오언태평송!)

지문에 있는 전투는 황산벌 전투로, 백제 패배 이후 멸망 ... - 백제 부흥 운동, 663년 백강 전투

(다) 시기 - 백제 멸망과 웅진 도독부 설치, 663년 계림 도독부 설치, 665년 취리산 회맹 등...
포인트가 정말 많은 문제~

 

수와 당을 바꿔치는 유형이 많이 보임! 이 부분 주의.
특히 1. 영양왕이 선빵을 쳤다는 사실은 반드시 주의!!!

ㄷ. ㄹ. 모두 영양왕 대의 사실이지만, (가) 이전이다.
영양왕의 수 선빵 공격 - 수의 침입(을지문덕과 살수대첩) - 수 멸망 - 당 건국, 천리장성 축조 
- 연개소문 정변 - 당 태종의 침입, 안시성 싸움 - 나 당 동맹 결성 


상식에 가까울 수 있겠지만... 그래도 김춘추(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은 헷갈리지 말자.
애초에 자료에 '김춘추'가 있는데 답이 [3]이 될 순 없지! 


642. 대야성 전투(의자왕의 침입) - 당시 선덕여왕
645. 안시성 싸움 - 이후 나당 동맹 
660. 백제의 멸망과 웅진도독부
661. 문무왕 즉위
663. 계림도독부 
663. 백강 전투
665. 취리산 회맹

당나라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한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는 과정에서, 허수아비 정권인 백제를 내세워 신라에게 백제와 화친하도록 강요하여 이루어진 동맹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취리산회맹(就利山會盟))]

그 뒤 665년 8월 취리산에서 유인원이 입회한 가운데 신라측의 문무왕 및 여러 대신과 백제측의 웅진도독 부여 융 사이에 회맹이 이루어졌다.
회맹은 중국 고대의 방식을 따라 이곳에 단(壇)을 쌓고 백마를 죽여 하늘과 땅의 신 및 산천의 신에게 제사한 후 그 피를 회맹인들의 입에 발라 맹세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맹세하는 글(盟文)은 유인궤가 지었는데, 내용은 신라와 백제가 영원한 우방으로서 형제처럼 화친하겠다는 것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취리산회맹(就利山會盟))]


668. 고구려 멸망과 안동 도호부
671. 소부리주 설치
675 - 676. 나 당 전쟁


 

김춘추, 즉 태종 무열왕 이후 문무왕인데... 삼국통일 과정에서 무열왕이 사망했다는 것 꼭 기억!
즉 삼국통일을 완성한 건 문무왕 대의 사실임.

ㄴ. 계림도독부는 663년!
여기서 ㄹ. 보장왕의 고구려 부흥 운동은... 보통 교과서에 나오는 안승과 검모잠의 부흥 운동과 아예 다름!

검모잠, 안승의 부흥 운동 - 고구려 멸망 668년 직후 ... 신라의 지원을 통해 익산의 보덕국의 왕으로 책봉
보장왕의 부흥 운동 - 훗날 발해가 되는 지역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 운동 도모 


 

문제를 푸는 데에는 국어 실력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문제~
당 태종이 침입한 안시성 싸움 이후 '다시 정벌을 하려 한 것'이므로, 
답은 4번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고구려까지 멸망시킨 당나라와 신라는 급기야 옛 백제 영토의 귀속 문제로 심각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670년(문무왕 10) 당나라 군사가 머물러 있던 웅진도독부와 신라 간의 화친이 깨지고, 신라는 힘으로 옛 백제의 영토를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그 해에 신라의 품일(品日)·문충(文忠) 등이 백제의 63성을 빼앗아 그 곳 사람들을 신라의 영토로 옮겼다. 또 천존(天存)·죽지(竹旨) 등이 12성을 빼앗고, 군관(軍官)·문영(文潁) 등이 12성을 빼앗는 등 모두 87성을 차지하였다.
671년에는 석성(石城)싸움에서 당나라 군사 5,300명을 베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신라는 백제의 옛 도성이던 사비를 중심으로 하는 소부리주를 설치해, 여기에 도독(都督)으로 아찬(阿飡)인 진왕(眞王)을 임명함으로써 신라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러한 신라의 태도에 대응해, 당나라는 백제의 부흥 운동군을 사주해 신라와 대항하게 했으나, 672년의 고성성(固省城)싸움과 가림성(加林城)싸움을 거쳐 신라의 군대가 백제의 전 영토에 다시 주둔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물러났으며, 웅진도독부는 랴오둥(遼東) 지방으로 옮겨졌다.
당은 신라의 소부리주 설치에 대해 항의하고, 김인문(金仁問)을 문무왕을 대신해 신라 왕으로 삼는 등의 책동을 하였다.
그러나 결국 676년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해전에서 사찬 시득(施得)이 이끄는 신라군이 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를 22차의 전투 끝에 물리침으로써 백제의 옛 땅이 모두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소부리주는 671년에 설치되어 686년(신문왕 5)에 웅천주(熊川州)가 되면서 군으로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소부리주(所夫里州))]

통일신라

 

우선, 고려 문화사에서 출제될 수도 있는 부분인데...
<삼국사기>에서는 상대, 중대, 하대
<삼국유사>에서는 상고, 중고, 하고로 나눈다는 점을 기억


만파식적 설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신문왕!
신문왕은 단골 출제 대상이지만... 'ㄴ' 예작부 설치 중요!

법흥왕 병부
진흥왕 경 - 사정부(무열왕)의 전신
품주
진평왕 조부, 위화부, 예부, 영객부
진덕여왕 품주를 이원화하여 집사부, 창부로 개편 
좌이방부
태종 무열왕 사정부
문무왕 우이방부
신문왕 공작부, 예작부
경덕왕 사정부를 '숙정대'로 개편 

성덕왕의 업적 중 다소 생소한 '백관잠 제정'
이것 외에도 '박사' 신설, '누각' 설치 (천문과학 연구),
공자와 그 제자의 초상화 안치(유학 관심) ... 등의 사실도 있음!

 

성덕왕은 즉위 이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는데, 그런 측면에서 711년(성덕왕 10년) 왕이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 주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현재 백관잠의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 ‘백관잠’의 ‘백관(百官)’이 모든 신료를 의미하고 ‘잠(箴)’은 경계의 의미를 지닌다고 보면, 백관잠은 전제 왕권 아래에서 모든 신료가 받들어야 할 일종의 행동 지침[戒名]을 적은 것으로 추정되며, 왕권을 제약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일종의 견제로 볼 수도 있다.

713년(성덕왕 12년)에는 제사를 관장하는 전사서(典祀署)를 설치하고, 717년(성덕왕 16년) 당(唐)나라에 갔던 사신이 돌아와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 즉 문선왕(文宣王)과 그 제자들의 초상화를 바치자 성덕왕은 국학인 태학(太學)에 이를 안치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성덕왕이 유교적 측면에 입각해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음을 뜻한다. 그리고 717년에는 의박사(醫博士)와 산박사(筭博士)를 각각 1명씩 신설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처음으로 누각(漏刻), 다시 말해 물시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전통 사회에서 천문⋅역산학은 흔히 ‘제왕(帝王)의 학문’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유교에서는 천문을 관찰하여 농경에 필요한 4계절의 변화와 규칙성을 살펴 백성에게 알려 주는 것을 제왕의 중요한 임무로 꼽았다. 따라서 산박사의 신설과 누각의 설치에는 유교적 정치 이념에 입각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성덕왕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성덕왕은 상문사(詳文司)를 고쳐 통문박사(通文博士)로 삼고 표문(表文) 쓰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재위 36년 동안 모두 43회에 걸쳐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는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전체 횟수의 3분의 1에 달한다. 이렇듯 성덕왕 대에 당나라와의 외교에 공을 들인 것은 당나라에서 들여 온 제도와 문물을 통해 왕권 강화라는 정치적 목표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친당적인 외교 노선을 통한 왕권의 강화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이 즉위하기 이전부터 견지하였던 정책 방향이었다. 그러므로 통문박사를 설치하여 표문 작성을 전담케 한 조치도 왕권 강화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성덕왕은 여러 측면에서 각종 제도와 문물의 정비를 단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이 왕권 강화에 이바지함으로써 신라 중대 ‘전제 왕권’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누구세요???

하지만 효소왕도 꼭 기억하자!
신문왕과 성덕왕 사이의 왕이다. 딱 한 줄로 '서시 및 남시 설치' ... 가 출제 범위의 개략.


신문왕, 성덕왕과 같은 단골 출제 대상이 아니라
경덕왕, 원성왕, 헌덕왕, 흥덕왕 등에 주의를 기울여 보기로 했음...


어이 털리는 문제 중 하나인데,
'문왕'인 것은 알 수 있어도 문왕의 재위 시기에 해당하는 신라 왕이 누구인지 알아야 함 ㅋㅋㅋ
문왕의 재위 시기는 어마어마하게 긴데~ 737-793년이다.

1. 신문왕 대에는 발해 ㄴㄴ 
2. 에 해당하는 청해진 - 흥덕왕 ~ 9세기 인물임
3. 에 해당하는 삼대목 - 진성여왕 ~ 신라 말기이므로 문왕과 시기가 맞지 않음 
결국 답은 4... 



다만! 이전 기출 문제 중 2015년 지방직 9급 한국사 문제로,

이 문제가 있는데, 이 당시 공부를 좀 깊게 했다면 단순히 '발해'만 파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문왕 당시의 일인 것까지 개괄적으로 공부했다면 저 문제를 맞힐 수 있었을 것이다.


복수 장관제!!!!! 신라의 특징이니, 꼭 기억!

 

'주'의 장관 이름 변화

지증왕 - 군주
문무왕 - 총관
원성왕 - 도독


발해에 대한 문제이긴 한데, 통일신라와 발해는 어차피 자주 묶여 출제되니 보너스로...

위의 복수 차관을 묻는 문제를 잘 기억하고 있다면 이 문제도 쉽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답은 4번!

 


문제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지만, 타임라인 정리가 중요할 것 같다.

김지정의 난, 96 각간의 난 - 혜공왕 피살 - 신라 하대 - 원성왕 / 소성왕 / 헌덕왕 ... - 흥덕왕 - 진성여왕

좀 어렵게 내면 이 사이에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등을 낼 수 있을 거 같음 


 

완산주와 무진주 바꿔치기 조심!
궁예와 견훤의 출신 성분도 따로 공부해 두자.

마침 궁예와 견훤을 다룬 문제가 딱 나옴!

궁예 - 신라의 왕자 출신, 위 문제에서의 핵심 키워드는 '신하(왕건)에게 버림을 받았고'
견훤 - 아들(신검)에게 화를 입었는데(금산사 유폐)


견훤 단독 문제 - 한국사능력시험 기출

이 시기는 고려의 건국 과정을 묻기도 좋지만,
특히 왕건, 궁예, 견훤, 경순왕, 6두품 유민들 중심으로 인물이 출제될 수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