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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인간극장

철없는 디자인 전공생의 중소기업 입사기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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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과 노들 사이의 한 육교, 연고도 없는 지역인데 애착이 많이 생겼다. 아 근데 수평 흔들렸네...

작은 회사라지만 그래도 잠깐은 마음을 붙일 곳이라 생각했던 곳, 출퇴근을 위해서는 회사가 위치한 곳이 땅값이 굉장히 비쌌기 때문에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는 출퇴근 거리가 그나마 가깝고 (근데 막상 해보니 40분^^;ㅋㅋㅋㅋㅋㅋㅋ) 물가가 저렴한 곳으로 알아보았다.
노량진밖에 없었다. 일단 3개월의 수습을 거치기도 하고, 내가 당장 언제 목이 잘릴지 모르니 고시원으로 알아보는 게 맞겠지.
노량진에서 지내기로 결심한 순간, 친구들은 농담스레 '너 거기서 다른 생각 하는거 아니냐'라고 말을 했다. 나쁜 뜻이 아니라, 모두가 다 알듯이 노량진은 시험의 메카라 알려져 있다. 기성 언론이 MZ세대니 뭐니 하며 2030세대가 철 없이 돈 쓰고, 팔랑귀마냥 휘둘리고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포장한다면, 이 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청춘의 모습은 다른 사람인데도 서로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 9호선의 출근길과 퇴근길은 정말 보는 사람까지 지치게 하는 모습이라면, 노량진역에서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슬프고 지쳐있는 모습이지만, 그래도 내일이라면, 혹은 나중에라도 조금은 다리를 뻗을 수 있겠지... 하는 그런 기대감과 형형함이 눈에 차 있었다. 출퇴근을 하며 저마다 다른 길을 향해 가는 인간군상을 매번 보게 되는데, 내가 비록 당시에는 수험생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노량진 어디에서나 보이는 63빌딩의 위압적인 모습과 대비되는 이 곳 동작구의 낡은 달동네와 어우러지는 치열한 현장은 결국 다른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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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설 주의*

*약 4-5월까지 쓰일 이야기임. 현재 진행형...
*이 시리즈는 그냥 일기에 가깝지, 도움되는 얘기 없음
*광고 때문에 레이아웃이 상상 이상으로 지저분할 수 있음


*잠깐만~
면접 시 살펴봐야 할 것
잡플래닛과 함께 >>크레딧잡<<도 꼭 참고하기. 나는 왜 이걸 못 봐서...

퇴사율을 체크하는 건 기본이다.

생각보다 졸~라 많다. 랜덤박스도 아니고 합격해야 알게 됨.

- 면접관이 약속한 일정에 늦지는 않는지 (시간 약속은 기본 중 기본)
- 사옥이 따로 있는지, 건물의 관리 상태는 괜찮은지
- 통근하기에는 적절한지
- 주변 환경은 어떠한지 (식당, 물가 상태, 교통편)
- 면접관의 태도
(무례한 말을 하면 중간에 뛰쳐나와도 무방, 서로 초면인 면접에서도 이 정도라면 입사 후에는 지옥불인페르노가 기다림)
- 면접실로 이동하기 전 사무실을 자세히 볼 수 있다면 최대한 자세히 보자, 사원들의 표정에 수심이 가득한지...
- 화장실, 탕비실 등 기본적인 설비 등의 상태 (관리가 잘 되어있는지, 안 되어있다면 진짜 사원 시켜서 청소하는...)
- 빈 자리가 보이는지 (도망가거나 퇴사한 사람이 많다는 것!)
- 면접 마지막에는 항상 '회사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보는데, 이 때에는 사원 구성이 어떠한지 꼭 여쭤보자, 사원급은 몇 명인지, 중간 관리자는 몇 명인지 등등... (예를 들면 나는 이 부분에서 실수를 했는데, 사원급이 많아 사수라 할 분이 딱히 없었다.)
- 복지 사항에 관해 물어볼 수 있으면 꼭 물어보자. 식대는 제공되는지 등등...



입사를 결정지었던 면접 자체는 적당한 긴장감 반, 그리고 편한 마음 반으로 진행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떨어지면 다른 곳을 찾아보면 그만, 붙으면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다니기, 딱 그 두 가지 생각만 갖고 임했다.

나는 성격 자체가 겁 많고 어수룩하고 나를 포장할 줄 모르는 성격이다. 올곧다고 표현하기엔 현대 사회는 냉정하므로 그냥 일자무식 바보같다는 쪽에 좀 더 가깝다 ㅎㅎ^^;; 그래도 때가 다가오면 용감해진다. 어차피 닥친 일이니까.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정신을 제일 잘 실천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막상 실전에 임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평스레 곧잘 하는 편이다. 면접은 재밌었다. 오히려 면접 전의 그 불쾌한 긴장감이 난 제일 싫다. 자기 소개로 시작하는 정형적인 면접보다는, 어떤 작업을 해왔고 어느 분야에 흥미를 느끼는지에 관해 30분만 얘기하기로 한 계획이 1시간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적어도 회사에 대해서 사전 조사를 하는게 면접에 임하는 예의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회사가 어떤 방향성을 갖고 일을 하는 지에 대해서 많이 알아보았다. 저번 편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분야로 밀고 나가는 회사가 몇 없다고 생각했기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근데 막상 들어와놓고 보니 회사의 포폴은 좀 과장된 포트폴리오였던 것처럼 보인다..., 일단 일을 벌인 뒤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그런 주먹구구식 구조.
스스로는 말을 정말 못하고, 버벅이는 모습이 많다고 평을 내리는 편인데 막상 멍석을 깔아주면 신나서 재잘재잘 떠든다. 혹자 말로는 시끄럽다고 할 정도라 하니. 조곤함과 노곤함이 같이 섞인 수다쟁이인가보다.

한편, 면접을 볼 때에는 피면접자, 그러니까 구직자의 입장에서도 당연히 회사가 어떠한지 평가하게 된다. 회사의 위치는 어떻고, 사옥은 어떤지, 건물이 후줄근하지는 않은지, 주변 환경은 어떤지 ,일하기에 적절해보이는지... 등등 말이다. 그런 점에서 따지자면 회사 위치가 엄청 좋은 편은 아니었다. 몇 번 이사를 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약간 쎄~했던 점(앞으로 자주 언급됨^^;)은 정작 구인 공고는 A주소지에 있는데, 현재 회사는 B주소지에 있는 것. 심지어 사업자등록은 당연히 해놨을텐데, 검색을 하면 동명의 회사만 나올 뿐 내가 찾는 회사는 나타나질 않았다.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회사라니...대외비 회사도 아니고, 주소가 이게 맞는지 사실 면접을 보는 당일날까지도 긴가민가했다.
이 문제는 얼마전까지도 그대로였다. 네이버 지도에 내 회사를 검색해도 정작 나오지 않으니 참 기분이 찝찝. 조금 높은 언덕 위, 안쪽 건물로 들어가야만 보이는 회사, 채광이 엄청 좋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 빌딩. 아무튼 여기도 서울은 서울이다. 몇 블럭만 건너가면 대한민국 경제의 심장 3대장 중 하나인 강남이기도 하다. 건물의 외관에 관한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방문객을 맞이해주시는 분의 인상, 그리고 사무실 자체의 분위기는 평온하고 깔끔했다. 사람의 인원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체크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렇게 적은 줄은 잘 몰랐다. 아무튼, 저번처럼 1번 볼 면접을 2번에 걸쳐 볼 뻔했지만, 합격이 되었다. 면접에 대한 인상 자체는 나쁘지 않았기에 그러려니 했다. 다만, 1주일 안에 방을 구해야만 하는 상황.

우선은 회사 일이 어떻게 풀릴지도 모르고, 다녀봐야만 아니 단기로 다닐 수 있는 곳은 고시원이 마땅하다 생각했다. 서울은 상상 이상으로 사회초년생에게는 가혹한 환경이다. 연봉 2500, 벌이가 시원찮으니 좋은 방을 구하자니 저축을 할 수도 없고, 후진 방을 구하자니 여기서는 정말 잠만 자야하나 싶을 정도로 영 그렇다. 그래도 별 수 있나! 까라면 까야지...

월세 33만원, 실제보단 야악간 넓게 찍혔다.


익숙한 본가에 있다가 드디어 외지로 나오게 되는데, 서운함과 기대감이 교차했다. 서운함이라 함은 그래도 주말에 본가에 갈 수 있다 하더라도 약간의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것을 말했고, 기대감이라는 것은 전공을 살린 일이란 무엇일지, 실무에서 경험하는 UX이란 무엇일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때 나는 너무나도 순진해서 연봉이 적은 것은 알았지만, 사실상 세금을 떼고나면 더 적어질 것까지 예상을 못했다. 세상은 세후가 아닌 세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첫 월급을 받은 뒤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밑줄을 친 이유는... 아무리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지만, 회사 생활이 정말 공고와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간에 처음과 끝이 가장 망설여지고 고민이 된다는데, 지금은 내가 끝을 선언하기에 앞서(퇴사 통보) 가장 긴장을 안고있는 시기라면... 그때에는 첫 출근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긴장했다. 처음으로 내 자리가 주어지고, 내 컴퓨터가 생기고, 내가 직접 무언가를 만들고... 내가 직접 제안을 한다는 건 무슨 느낌일지,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딱 그 어두컴컴한 빌딩으로 출근을 했고,
첫날에는 말 그대로 컴퓨터만 주어졌지, 회사 이메일을 만들어서 쓰는 개념도 신기하게 다가왔고, 그룹 웨어를 활용하는 것도, 이메일을 이용한 소통도, 그리고 회사 특유의 말투 (상신드립니다, 품의 올립니다, 공유합니다, 송부드립니다, 유첨 문서 등...)에 익숙해지는 등 눈치 살피기에만 바빴던 것 같다. 이때만 하더라도 나보다 단 1개월 먼저 입사하신 분께도 선배라는 호칭을 썼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도리에 맞는건지, 약간은 좀 어색한 호칭같기도 했다. 사실 여기서 조금은 또 쎄함의 2차 포인트 (대체 몇차까지 ;;;?)가 느껴졌는데, 회사 인원이 적은 것으로는 감이 느껴졌지만 겉으로 봐서는 잘 몰랐는데, 정말 적었다. 10명을 좀 넘기는 수준이니... 사실 디자인 에이전시라는 것이 원래 소규모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거 괜찮은건가, 조금은 무서웠다.

쎄한 포인트가 또 있었다. 쎄한 건 앞으로도 자주 언급할텐데... 이건 치명적일 수도 있다. 무려 사수가 없다는 것! 나의 옆자리, 그리고 건너편에 계신 분 모두 들어온지 1년채 되질 않으셨으니 사실 모두가 신입인 셈이다. 다만 다행이라면 먼저 경험해보신 것이 많아 이런 저런 업무 사항이 들어오면 잘 체크를 해주시기는 했다. 그렇지만 보통 익히 들은 사수, 부사수의 개념이 없으니... 그동안 잘못 배워온 스킬을 싹~ 고칠 기회가 없는 느낌이었다. 신입만 있는 회사라니,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나가서 빈 자리를 우리들이 공석을 채운 셈이다.

계약서가 왜 이랬지? 근로기준법이 우선이다. 30일.


그러니까 회사의 위치가 잘 나오지도 않고, 인원이 적고, 사원급이 많은 부분이 영 마음에 걸렸고, 여기에 더 이어서 근로계약서를 바로 쓴 것이 아니라 이틀 정도 지나서 썼었다. 이것도 4차 쎄함 포인트... 이때 마음만 먹으면 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어떤 일자리이든 감사할 준비가 되어있었으므로 개의치않고, 결코 높지만은 않은 연봉을 확인하고, 자율출퇴근제가 적용되어 7시부터 출근해 4시에 퇴근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하고, 식대는 월급에 10만원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5차 쎄함 포인트를 느낀 뒤 사인을 했다. 아까 물가가 정말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냥 월급은 월급이지 구태여 식대 포함이라 표현할 필요도 없을텐데... 이 곳은 강남, 점심값만 해결하더라도 기본 8천원은 물론, 1만원도 우습게 넘어가는 곳이다. 이런 상황이면 10만원은 보름도 안되어서 다 사라진다고. 식대 제공이라는 명목이 약간은 민망한게, 식대 제공조차 없다면 이 곳의 급여는 179만원인데, 이거 세금 안 떼어가는 아르바이트가 더 높다...

*식대 제공은 보통 세금 문제때문에 10만원까지는 비과세가 되어 의례적으로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제부터 나는 이마에 인두를 찍힌 것 마냥 이 회사에 충성과 헌신을 다해야 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사수도 없고, 주변의 동료 분들은 역시 나와 같이 신입이셨지만 그래도 몇 개월 먼저 들어오신 경험 덕에 이런 저런 잔잔바리 업무를 맡아 스킬을 키우셨고, 근로계약서를 당일날 쓰지는 않아 약간 찜찜했고... 그래도 바로 쓰기는 했고, 처음의 어수선한 절차는 잘 마무리가 되었으니 이제 적응만 하면 되는 일이다. 가을께 이후 정직원으로 발령되는 3개월 간은 큰 일은 없었을까? 내 첫 업무는 무엇이었냐...

사직을 결정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업무 그 자체이다. 급여도 급여지만, 일단 내가 처음으로 맡은 일은, 회사가 있는 A지역이 아니라 잠시 프로젝트를 위해 빌린 B사무실에 1-2주정도 출근을 해 쓰레기를 치우고, 비품을 정리하고, 이사를 하는 과정이었다.

진짜 한동안 이랬음 ;;

그 이후에 한 일도 비슷하다. 비품 조사를 하고, 회사 돈으로 구입을 한 것이니 손실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모든 물품을 등록하고 중고 거래를 하고 성사시키기, 테스트 파일 열고 잘 작동하나 확인하기... 어...내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인가.

자세하게 말하면 또 특정이 가능하니 에둘러 말하는 것이지만, 여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동안 흔히 생각하는 디자인과는 거리가 있는 업무를 한 셈... 지금도 대동소이한데, 가끔 들어오는 원청(우린 하청이니까)회사의 급한 업무를 도맡아 수행하는 것 외에는 비품을 정리하고, 정리하고, ... UX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인터뷰 및 사용자 조사에서 직접 사람들을 모집하는 과정을 맡았던 것. 신입이니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한 풍경과는 달랐다. 다만 지금에서 돌이켜보자면 UX 분야 신입으로서 일을 했다기보다는, 그때 그때 급한 불을 꺼주는 조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다른 분들이 시간 관계상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도맡아 처리하는 것... 이런건 경력이 될 수 없다.

흔히 생각하는 디자이너의 책상은 이렇지 않을까?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피그마 ... 등을 활용하는 것과는 다르게 오히려 파워포인트와 엑셀에 익숙해졌고,
대학을 다니던 내내 쓰던 맥 컴퓨터의 단축키가 다시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Ctrl키와 Cmd키의 위치를 헷갈려 잘못된 단축키를 막 누르던 순간 내가 금세 윈도우에 적응이 됐구나, 싶었다. 모니터의 해상도가 썩 좋은 것도 아니고, 장비 지원이 마땅히 되는 것도 아니기에... 그냥 적당한 사양의 윈도우 컴퓨터로 보안 서버에 들어가 작업을 하고, 데이터를 정리하는 일이 신입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의 대부분이었다. 따지고보면 일반적인 사무일과 크게 다른 건 없었는데, 뭔가 한 가지에 특화된 일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건 분명했다. 나는 파워포인트만 잘 만질 수 있게 됐다.

이런 화면이 아니라...
이런 화면을 더 많이 보게 된다.&amp;nbsp; &amp;nbsp; &amp;nbsp; 출처 : https://yslab.kr/148

흔히 생각하는 디자이너의 작업 화면은 다양한 그래픽이 휘황찬란하게 날아다니고, 그 현장은 활발하게 의견을 공유하며 시안을 제작하는 모습일텐데... 여긴 그렇진 않았다. 신입 몇 명이서 디자인을 산출하고 '이게 정답입니다'라고 할 순 없었으니까. 물론 그런 곳도 있지만, '설계서'라 함은 최대한 보수적이고 흑백의 무미건조한 컴포넌트로 만들어져 있었고, 나 역시 그에 동화되어서 흑백의 감정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윈도우 특유의 투박한 맑은 고딕 폰트를 9pt, 10pt쯤으로 줄였을 때 보이는 미학과, 원색을 이용해 강조를 하는 설계서의 미적인 양식이 이제는 정이 들었으니까... , 나는 되게 블링블링하고 화려하고 실험적인 걸 좋아하는데, 여기서는 그 기를 죽여야한다. 물론 다 알고 들어왔다. UX/UI라는게 디자인 쪽에서도 가장 엄격하고, 보수적으로 접근해야하는 면이 있다.
다만 그런 일을 해도 상관은 없는데, 점점 이런 방식으로 하다가는 포트폴리오는 물론 경력에 있어서 내가 내세울 건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정말이다. 뭔가 위기 의식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이러기 위해서 내가 디자인을 전공을 했나, 실력이 어설퍼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은 서러움이 몰려왔다.
처음의 2, 3개월 간은 별 생각 없이 강남의 높은 고개를 오르며 출퇴근을 반복했는데, 어느 순간 Adobe 프로그램을 몇 달 동안 한번도 켜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닫고, 특히 처음 들어와서 진행했던 철거반(...)의 역할을 다시 떠맡게 되었을 때에는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이 일을 계속하는 게 맞는지, 내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론이 이제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여태까지 해왔던건 정말 숫자만 수정하고, 라벨링만 수정하고... 그런 일이었던 것. 그 외에는 원청을 위한 컨셉을 제안하는 것? 사실상 모든게 원청 회사의 디자인을 위한 일이지, 이 회사에서만 할 수 있는 디자인에 참여해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고 판단이 들었다. 여기까지는 1차적인 회의감.

업무 내용과는 별개로 좋은 점은 딱 하나 있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정말 너무 착하고 좋은 분들. 신기할 정도이다. 회사를 다니면 가장 걱정했던 게, 워낙 허당이라는 소리도 많이 듣고 어설픈 면도 많아서 실수가 잦을까봐... 정말 실수를 몇 번 하긴 했다. 실수로 서버에 있는 파일 이름을 중복되게 저장해서 날아갈 뻔한 일도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의 모든 직원 분들은 정말 착하셨다. 군말을 절대 안하신다. 혼내시더라도 혼낸다는 생각이 든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딱 내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 지적할 뿐이고, 개인주의 성향도 강하시기에 최소한 비즈니스적인 부분에서는 모두 원만하게 지낼 수 있었다. 정말 리뷰는 리뷰대로 모두가 착하고 멋있는 분이다.
하지만 우리는 회사를 왜 다니는가? 사교모임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온 곳이고, 경력을 키우기 위해 온 곳인데...

1개월, 2개월을 거쳐가며 그래도 처음에는 '막 들어온 햇병아리니까 이럴 수 있지'라고 생각을 했는데, 한치 앞을 모르는 업무 스케줄, 번복되는 원청의 요청, 정작 디자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지엽적인 부분만 수정하는 설계서 작업, 사람의 행동 심리를 근본적으로 들여다보기에는 내가 부족한 것인지, 업무 환경의 문제인지 도저히 모르는... 그런 혼란 속에서 조금은 다른 결정을 내리게 됐다.
내가 꼭 디자인으로 먹고 살아야되는가, 하는 그런 문제.
디자인은 결국 전공이고, 전공을 거쳐오며 배워온 여러가지 스킬이나 방법론은 도구에 불과하다.
그걸 활용해서 내가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는 내가 설계할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꼭 디자인을 업으로 삼는 회사에 갈 필요는 없겠다고 느꼈고, 다른 도전도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전과는 다르게, 꿈을 좇았던 내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뭔가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했다.

최저임금과 비교해서 계산기를 두드려본 뒤 사육신공원에서 좀 사색을 했다...

종합해보자면 업무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급여도 생각 이상으로 썩 좋은 건 아니다. 능력이나 어떤 경력이 보장되어있는 게 아닌 쌩신입이다보니까, 사실 무슨 돈을 받더라도 그러려니 하려고 했는데, 마냥 그런건 아닌 것 같다. 주변의 의견을 구해보면 '아무리 해도 그렇지 너무 낮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업무가 안정적이거나, 정말 칼같은 워라밸을 보장하거나, 자유로움을 보장하거나, 확실한 스킬이 늘어나면 모르겠는데 그런 것과도 거리가 멀었으니...
식비 제공도 없고, 사실상 아르바이트보다 적은 가처분 소득에, 사수도 없고, 체계가 그렇게 정해져 있는건 아니고, 회사에서 주로 하는 디자인은 결국 원청의 디자인이 되고, 내가 하는 것은 잡무밖에 없었다면... 다른 회사에 가도 이러는 건 아닌가? 다른 회사도 이러나? 다른 곳을 가더라도 불확실함이 가득하지 않을까?
디자인으로 모험을 하고 싶진 않았다. 대표가 나에게 맡기는 일은 '이게 맞나...'싶은 일뿐이었으니까.

물론 저 월급으로도 먹고 사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법적으로 정해진 최저임금은 말 그대로 '혼자서도, 풍요롭고 중산층에 준하는 삶은 아니더라도 굶주리는 일은 피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 다만 방세 33만원을 내고, 저축은 50% 정도 하고, 식비 지급이 따로 되지는 않으니까 점심 가격으로 8천원 ,9천원을 쓰고, 저녁은 3-4천원 정도로 대충 해결하고, 가끔의 생필품을 사고... 또 돈이 남으면 저축을 하고, 그렇게 하다보니 1년이면 천만원쯤은 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돈은 생각보다 차곡차곡 잘 모으고 있다. 이 정도라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전부터 차곡차곡. 이 정도면 괜찮은 건가? 연봉이 2500만원에 준하더라도 헝그리 정신으로 제법 돈을 모을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입사를 결정한 것도 있으니, 처음에는 급여 내역을 보고 머리가 좀 띵-하긴 했지만 내가 견뎌내야 할 순간이라 생각했다. 나는 나를 낮출 필요가 있었고, 겸허하게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한 방향이 오답일 수도 있겠다.
첫 직장의 연봉이 나중을 결정한다는 낙인도 있다는데. 내가 효도를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사랑을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내가 기꺼이 나를 희생할 수 있을까? 적어도 가족을 위해서 보탬이 되는 가장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너무 먼 미래까지 내다보는 것 같지만,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96년생인데 이대로는 안된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실 욕심이 되게 많았던 걸까...

우리나라의 직장에 관해서는 '첫 직장'이 정말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사실 나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부러 찾아보더라도 저마다 입장이 다르니 참고만 할 수 있었고, 주변에 도움이나 조언을 구할 만한 곳도 없었으니 그냥 나 자신만 믿어야 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접 몸소 느껴봐야만 '아 좆됐군...'을 느낄 수 있기 때문. 월급을 받고 난 뒤 그럭저럭 저축을 할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 곳에서 하게 될 일과 체계없는 체계를 생각해보자니 '아 좆됐군...'을 적잖이 느꼈다. 뭔가 강구책이 필요했다. 퇴근을 하고나서 자기개발을 하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하나? 내가 정말 이제 디자인에 열의를 쏟을 수 있을까? 정답이 없는데... 또 그렇게 시간을 쓰고 아쉬운 결과를 얻으면 어떡하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면서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많이 났다. 엄마, 아빠 말씀 듣고 그냥 대학을 다른 곳으로 갈 걸... 하고 어차피 돌아오지도 않을 과거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바보같게도 다른 전공을 택했더라도 고충이 없는 건 아닌데도 말이다. 더 힘들었을 수도 있는데, 사람은 원래 간사하게도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걸 부러워하기 마련이다.)


회사에서 포폴을 쓸 수 없다면, 포트폴리오를 보강하기 위해 사이드 프로젝트, 개인 작업을 통해 퇴근 후에 보충을 할 수도 있다만
난 완전히 다른 길을 골랐다. 더 이상 '이게 맞나?'싶은 디자인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여태 해온 게 다 무위라고 느껴서 더 이상 이어나갈 욕심이 잘 생기지 않았다.
디자인이 좋은건 맞다, 다만 이걸 이제 업으로 삼고 매번 포트폴리오를 쌓으며 가까이 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일상에서 가까이 하는 디자인은 여전히 좋은데, 비즈니스가 되는 순간 이게 미워졌다. 면접을 준비하면서도 느낀 거였으니까.

사람은 위기에 몰리는 순간 정말 말도 안되는 계책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럴싸한 묘안을 떠올릴 수 있다.
나는 두 가지에 해당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시험에 도전해보는 것이다. 그 전에는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었는데,
노량진에 터를 잡은 이유가 이것이었나? 그냥, 본능적으로 서점에 가서 문제집을 한번 보기로 했다. 내가 시도해봄직 한가...
시험이라니, 정말 디자인과 연관이 없긴 했다. 근데 이 의지라면 못할 건 없다고 생각을 했다. 기출 문제 분석하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어차피 도박을 한다면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고, 비록 실패하더라도 나에게 책임을 온전히 지울 수 있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우선 퇴근을 한 뒤 하루에 딱 4시간만 공부를 해보는 것이다. 이 결정도 1주일동안 고민을 했다. 도전을 해도 되는 것인지,
주경야독을 못할 것은 없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낼 바에는 이 편이 훨씬 나았다. 어쨌든 목표가 존재하는 순간 살아갈 의욕이 생겼다.
다른건 없다. 그냥 이렇게 되었다면, 정답이 100% 존재하지 않는 디자인으로 밀고나가는 것보단 확실히 정직한 답과 오답이 존재하는 시험에 도전해서 성과를 낼 수 있다면, 엄마랑 같이 여행도 가고, 동생한테 좋은 것도 사주고, 나도 그럭저럭 ... 하루하루 이어나가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가치있는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목표는 디자인이 아니라, 먹고사니즘의 문제가 됐다. 그것도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더 해봄직 하다. 지금까지 내가 디자인을 하겠답시고 밀고 나갔던건 내가 들인 투입에 비해서 산출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거나, 그냥 애초에 나랑 안 맞았던 것일 수도 있었다. 매몰비용은 생각하지말고 과감하게 포기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가 더 재밌다.

나는 그게 너무나도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회사에서 해온 일이 무엇인지, 경력 프로젝트가 어떻게 되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음, 사무실에 있는 여러 비품을 치웠고요,
당근마켓에 물건을 내다 팔아 회사의 손실을 조금 보전했고,
가끔 들어오는 파일에 있는 오타나 아이콘 수정 사항 등을 발견하고 처리한 뒤,
글자를 하나하나 입력해서 회신 드렸습니다. 그게 제가 여태 해온 일의 전부입니다'가 끝이 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결정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마지막 희망인 내일채움공제도 현재 진행을 할 생각이 없나보다. (n차 쎄함 포인트^^;)
정규직 전환이 된지 이제 3개월 차인데도... 바로 할 수 있는 제도도 가입이 안되고 있다.
중소기업을 다니면 마지막 희망이 되는 이 제도도 기대를 내걸 수가 없다. 회사 운영진이 바쁘다는 핑계로... (여긴 인사팀, 회계팀 등이 따로 없다. 다 대표가 처리한다.)


3줄 요약

  • 아무리 겸허한 마음으로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이 급여는 정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듦.
  • 일의 내용이 정말 말도 안됨... 사실 여기에 쓰는 것도 좀스럽고 민망함 ㅋㅋㅋㅋㅋㅋㅋ
  • 가망이 없어서 결국 이대로는 안된다 생각하여, 확실하게 내가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보려 했음. 그게 시험 도전임.


3편과 4편에서는 주경야독을 결심했던 사람이 갑자기 왜 회사의 품을 나오기로 결심했는지, 공부 과정은 어떤 편인지 써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