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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다/한국사

[공무원 한국사] 대한민국 정부 수립 || 기출 및 포인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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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은 광화문(경복궁)과 서대문 사이에 있던 동양극장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서대문역 인근 종로구 평동 강북삼성병원 부지이다. 금광으로 돈을 번 친일파 최창학 소유의 별장이었던 이 집은 건축면적 396.69m2, 연면적 945.45m2(지하1층, 지상2층)규모로 지은 일본식 건물로, 1938년 완공 당시에는 죽첨장(竹添莊)이라 하였다. 8·15 광복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는데, 김구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경교[京橋;경구교(京口橋)의 약칭]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에 대한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김구가 반탁·건국·통일 운동을 주도할 때에는 흔히 서대문 경교장이라고 일컬었으며,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이용되었다.

지엽적으로 출제될 수 있는 부분, 예상 키워드, 고난도 포인트 등을 정리하는 글입니다.
시대에 따라 우선 정리한 뒤, 문화사 혹은 지역사 등 특정 문제 유형에 따라 부가적으로 정리할 예정입니다.

 

모바일보다는 데스크톱, PC 환경 이용을 추천드립니다 😅
모바일로 보면 글이 굉장히 지저분해 보입니다.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가감없는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광복과 분열


여운형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이 단독 인물 문제로 출제되는 경우가 많다. 행적이 다양한 것도 있고...
답이 ② 인 것도 중요하지만, 지문이 더 중요하다.
신한청년당, 고려 공산당 등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아 좌익계 인사임을 알 수 있고,
결정적으로 일장기 말소사건, 조선일보 사장 역임 등이 단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는, 광복 이전 조선건국동맹이 개편된 것

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변모한 것이다.


건준위는 '일시적 과도기' '치안대' 등이 핵심 키워드!


그리고 이들이 선포한 국가는 '조선 인민 공화국'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님 ;;;;; 


조선인민공화국은 이승만을 주석, 여운형을 부주석에 임명 


박헌영 등의 공산당계가 장악 - 안재홍의 탈퇴 


카이로 회담 - 미 영 - in due course
얄타 회담 - 미 영 소
포츠담 선언 - 미 영 중 소 
모스크바 3상 회의 - 미 영 소 (의결로, 미 영 중 소에 의한 신탁통치 결정)

 

특히 카이로 회담이 자주 출제되는데, '적당한 시기'를 단서로 찾으면 된다.
또한 참여 당사국은 '미국, 영국, 중국'이다. 중국을 소련으로 바꿔치는 유형 조심


모의고사 풀다가 본 문제...

얄타회담 - 루스벨트와 스탈린의 회담, 소련의 대일전 참전 결의 및 신탁통치 논의 
포츠담 선언 - 일본의 무조건 항복 요구, 한국 독립 재확인, 항복 미이행 시 확증 파괴 


〔사료 2-2-05〕 얄타에서 논의된 한국 문제
3. 한국
대통령은 1945년 2월 8일 스탈린 원수와의 대화에서 신탁 통치 문제를 꺼냈다. 대통령은 그가 한국을 위한 소련, 미국, 그리고 중국 대표로 구성된 3대 강국 신탁 통치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하고, 필리핀의 경우 인민들이 자치 정부를 준비하는 데 50년 가량 걸렸음을 지적하였다. 한국에 대하여 대통령은 신탁 통치 기간은 아마도 20년에서 30년일 것이라고 말했다. 스탈린 원수는 기간이 짧을수록 좋으며, 외국군이 한국에 주둔할 것인지를 물었다. 대통령이 부정적으로 대답하자 스탈린 원수는 동의하였다.
대통령은 그러고 나서 한국에 대하여 민감한 문제가 하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을 한국 신탁 통치에 참가시킬 필요는 없다고 느끼지만, 영국이 배제될 경우 스탈린의 생각으로는 영국이 분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스탈린 원수는 영국이 “아마도 분명히 기분이 상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스탈린은 (처칠) 수상이 “사실 우리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했으며, 그의 생각으로는 영국이 초청되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Doc. E, p. E-24)
(출처: “Korea,” Handbook of Far Eastern Conference Discussions)
포츠담 선언

8. 카이로 선언의 요구 조건들이 이행될 것이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와 홋카이도, 규슈와 시코쿠, 그리고 우리가 결정하는 부속 도서로 제한될 것이다.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한 부분)

12. The occupying forces of the Allies shall be withdrawn from Japan as soon as these objectives have been accomplished and there has been established in accordance with the freely expressed will of the Japanese people a peacefully inclined and responsible government.

12. 연합국의 점령군은 이러한 목표가 완수되고 일본 인민들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평화를 지향하는 책임 있는 정부가 수립되는 즉시 일본에서 철수할 것이다.

13. We call upon the government of Japan to proclaim now the unconditional surrender of all Japanese armed forces, and to provide proper and adequate assurances of their good faith in such action. The alternative for Japan is prompt and utter destruction.

13. 우리는 일본 정부에게 이제 일본군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하고 이러한 조치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적절하고 충분한 성의있는 보장을 제공할 것을 촉구한다. 이에 대한 일본의 다른 대안은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이다.


여러 정당들

독립 촉성 중앙협의회 우익
이승만
정부 수립 이후 51년
자유당 창당
한국 민주당 (한민당) 우익
김성수 & 송진우

 
한국 독립당 우익
김구
개인 자격으로 귀국

 
국민당 안재홍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신민당 백남운

 
조선 공산당 박헌영 중심
이후 남로당
조선 인민당 여운형 중심
 
민족자주연맹 김규식 좌우합작노선  

 


건준위    :     조선 인민 공화국 선포 (1945. 9. 6. )


미군 진주와 미군정 선포 (1945. 9. 9. ) - 직접통치

대구 10. 1. 사건은 1946년 10월! - 미곡 수집령과 식량 배급제 부활로 인한 반미 시위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1945. 12)

한국 문제를 해결코자 '모스크바 3상 회의'가 개최됐고,
여기서 미 · 소 공동 위원회 개최 결정, 신탁통치 실시 등을 합의한 것 

1945년 12월 16일 미국 · 영국 · 소련은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26일까지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첨예한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의견을 조율하여 같은 해 12월 27일 합의문으로 네 개의 조로 이루어진 '미ㆍ영ㆍ소 3국 외무장관 회의 보고서'[5]를 발표했다. 이 문서에서 세 번째 조인 "한국(III.Korea)"에 관한 문단은 네 개 항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속칭〈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이다.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의 보고서에서 세 나라는 한반도의 정부수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이 중 세 번째 항은 신탁통치안을 담고 있다.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그 나라를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창조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교통, 농업과 조선인민의 민족문화의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책을 취할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 및 적절한 방책의 초안 구체화를 위하여 남조선 미합중국 사령부, 북조선 소련 사령부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제안서 준비에 대해 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 단체와 협의할 것이다.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서는 공동위원회에 대표를 둔 두 정부의 최후 결정 전에 미ㆍ영ㆍ소ㆍ중 정부의 참작을 위해 제출되겠다.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 및 조선 독립 국가 수립을 돕고 협력(신탁통치)하기 위한 방안을 만드는 것은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 및 조선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 공동위원회가 할 역할이겠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간의 4개국 신탁통치 협약을 작성하는 데 대해 미ㆍ영ㆍ소ㆍ 중 정부와 공동으로 참작할 수 있게 조선 임시 정부와 협의 후 제출되겠다.

남북 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 고려 및 남조선의 미합중국 사령부와 북조선의 소련 사령부 사이의 행정ㆍ경제 문제의 영원한 조화를 확립하는 조치의 구체화를 위해 2주 이내에 미국과 소련 사령부 대표 회의가 소집될 것이다.

신탁통치 반대 운동


남조선 국방 경비대 발족 (1946. 1.)


1차 미소 공위 (1946. 3)

미국과 소련의 주장을 잘 파악해야 하는데,
미국은 '모든 단체의 참여'를 주장하였고,
소련은 '정권 입맛에 맞는(?) 단체만 참여시키자'라고 주장함.


이승만의 정읍발언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


좌우 합작 운동

이승만의 정읍 발언에 화들짝 놀라.... 중도 세력의 합작 운동!


친탁인지 반탁인지, 3상회의 결정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등을 잘 파악하자.
좌 · 우 합작 운동 인사의 경우 3상 회의 결정에 찬성하였고, 따라서 신탁통치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았음


좌우 합작 운동은 성격 자체가 미군정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고, 미군정 역시 이를 지원함.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과 남조선 과도정부

따라서 미군정의 지원을 통해 기초적인 의회와 과도정부가 설립됨

입법의회의 의장은 김규식!
김규식 역시 인물 단독 문제로 출제될 가능성이 높으니 이 부분도 유념!


지문 2호에서 '미 · 소 공위 속개를 요청한다' 를 통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좌 · 우 합작 세력임을 알 수 있다.

미 군정기의 입법 기구는 '과도 입법 의원'을 의미하므로, 답은 ② 여운형이 아니라 김규식임을 알 수 있다.

③ 관선, 민선 두 의원이 있었다... 이것도 알아두기!


트루먼 독트린

해리 S. 트루먼이 1947년 3월 12일 의회에 보낸 이 교서의 직접적인 배경은 본문에 나와 있다. 미국이 “전체주의 정권들”을 상대로 한 자유국가의 방위를 지원해야 한다는 이 원칙은 미국 외교정책의 급격한 새 전환점으로, 또한 서반구가 이제 더 이상 유럽 식민화에 예속되지 않은 것임을 천명한 1823년의 먼로 독트린의 세계적 확대판으로 널리 환영 받았다. 소련은 트루먼 독트린을 소련 지배지역 및 소련 확장에 대한 미국의 공공연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 주한미국대사관 및 영사관 내 소개  

2차 미소 공위 결렬

이에 따라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고자 함 


여운형 암살


유엔 총회


미국의 주도로!!!!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방한과 방북 거부 (소련은 유엔 결정에 반대함)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48. 2. 10)

백범 김구의 시국성명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은 유엔 소총회가 소집되기 약 열흘 전1948년 2월 10일 발표됐다.


유엔 소총회 (48. 2. 26)

소련은 남한의 단독 선거에 반대함


남한 단독 총선 결정 (1948. 2. )


제주 4. 3 사건


남북 협상 (1948. 4. )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5. 10. 총선거 실시 

만 21세 이상이면 모든 국민에게 보통 선거권이 주어졌다.
첫 선거부터 보통 선거인 사례가 전 세계에서 몇이나 있을까? 보통 일이 아님.


제헌 국회와 정부 수립

[ㄷ] 제헌국회는 2년 임기라는 특수 성격이 있다는 것 반드시 기억! 


2석이 공석인 이유 -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③ 의 농지 개혁은, '유상몰수 | 유상 분배'임. 무상 방식은 북한의 토지 개혁.


여수 - 순천 10. 19 사건  ... 국가보안법 제정


49, 김구 암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