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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인간극장

[퇴사] 철없는 디자인 전공생의 중소기업 입사기 - 完

넌 멋모르고 『입사』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네가 외칠 말은 바로 『퇴사』이다!!!


오늘은 그동안의 자기연민에 관한 글이다. 안 읽어도 무방하다. 


주절주절 맥락없이 하고 싶은 말만 뇌까리던 긴 이야기가 드디어 끝을 맺게 된다. 
퇴사 선언을 한 뒤 글을 썼다는 것은 저번 편에서도 말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퇴사 절차를 밟았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긴장도 참 많이 됐고, 퇴사를 대체 어떻게 통보해야 뒤탈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지, 팀원에게는 또 어떻게 알리고... 등등의 걱정이 많았다. 막상 말하고 나니 별 거 없었다. 팀장님과 식사를 하면서 '내일 회식은 제 퇴사를 알리는 자리가 될까요?'라고 넌지시 여쭤봤는데 팀장님 역시 고민을 하시다가, 그러는게 좋겠다는 뉘앙스로 마무리가 됐다. 정작 그래놓고서는 회식 자리에서 내가 머뭇머뭇거리자 팀장님께서 '사실 오늘 모인 건 다름이 아니라 글쓴이의 중대 결정이 있기 때문이에요.' 라고 멍석을 깔아 주셨으니 안 할 수가 없다. ㅋㅋㅋㅋㅋㅋ 뭐라 말했는지 생각도 안 나는데... 그냥 퇴사 면담처럼 말했다. 역시 나는 시작 직전을 망설이지, 시작하고 나서는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타입일까, 말이 막힐 틈이 없었다.
다들 아쉬워하는 눈빛과 말씀에서 감동을 느끼기는 했지만 내 결정은 돌이킬 수 없다. 이젠 유종의 미만 거두자는 생각뿐이었고, 다행히 잘 거두어서 현재 5/6일 자로 퇴사를 마쳤다.

수많은 썰에 관해 서치해본 바, 퇴사 절차가 더 지저분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겁을 먹었는데... 
일단 퇴사를 결정하는 순간 당신은 갑이다. 철저하게 갑이니 겁 먹지 말자! 

퇴사를 알리는 자리, 동료 분이 추천해주신 숙성횟집. 도미를 처음 먹어봤는데 정말 녹아 내린다.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당연히 퇴사를 생각하고 들어온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작은 회사라 하더라도 경력을 쌓고, 차례차례 성장해나가는 경험이 있다면 소득이 적든, 규모가 어떻든 확실히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건 좀 순진한 생각이었다. 정말 순진한 생각이었다. 

늘 말하는 이야기였지만, 내가 처음에 회사에 들어왔을 때의 포부는 다음과 같았다. 

- 공고를 보니까 조금은 지원자가 적어도, 대졸 신입을 구하고, 공고의 내용 역시 외국어를 적극적으로 할 줄 아며 UX 리서치, 설계, 기획 업무에 관한게 있네? 말하기는 못해도 읽고 쓰는 데에는 문제가 없고 영어는... 회사의 포트폴리오를 보니까 한 분야로 특화된 사업을 꾸준히 수주하여 진행하고 있고, 이 부분이라면 경력을 키우는 데에 나쁜 부분이 없지는 않겠다... 

였다. 정말 이렇게 생각했고 면접의 인상 역시 회의실에 있는 빼곡한 회의 흔적을 보니 제법 신뢰가 갔다. 회사의 분위기는 회의실과 사람들의 표정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두 부분 역시 크게 하자없이 내 인상에는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면접을 본 뒤에는 붙거나 말거나, 였는데 적은 연봉이라 하더라도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정말 기뻤다. 나도 어디에 소속감을 느낄 수 있겠구나. 

근데 지금 돌이켜보니 이런 회사는 피하는게 좋다, 싶은 조건이 꽤 많았다. 회사 규모가 작음, 한 사람이 연차를 쓰면 다른 사람이 전부 다 수습해야 함, 포트폴리오가 쌓이지 않음, 등등...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부끄러움, 뭐 그런 게 있다. 

 

회사 차원에서 스튜디오 단위로 작업물이 올라가는 걸 보면 너무 부러웠다.


어느 회사나 풍속도는 비슷하겠지만, 나는 디자인과 관련있는 일보다는 정말 물건을 조달하고, 청소하는 일만 한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대기업 등에서 회의 등을 위해 외부 직원이 방문하시면 그 직원분께서 느껴지는 전문성과 내 하찮은 업무(...)가 너무 대비가 되는 것이다. 그런 날이면 참 동경심이 들면서도, 내가 디자인을 미워하는 건 아니네, 그런 생각도 들고 내가 너무 작게만 느껴진다. 내가 실력이 부족하고 경험도 부족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만 해야하나...싶어서. 기업의 규모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배우는 기회에 대해서 너무 어설펐던 게 너무 아쉽다. 잘하고 싶은데, 실무에서 제대로 스킬을 갖고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원청에서 들어오는 의뢰를 수행하더라도 그건 원청의 포트폴리오지 내 포트폴리오가 아니다. 

기업은 학교가 아니다. 하지만 학교가 아니라고 해서 성장의 기회조차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회사라는 것도 역시 사회화가 이뤄지는 터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학교가 아니지만 학교에 준하는 생활이 이뤄지는 곳에서 기본적인 사무 행정, 일이 돌아가는 모습, 소통의 방식, 업무 용어 등에 대해서는 조금 감을 잡기는 했지만, 그래도 용의주도하게 참여하여 성과라고 내놓기에는 1건도 없다는 것이 많이 유감스럽다. 아마 디자인으로 계속 업을 삼고자 했다면 더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래는 얼마 전의 이야기이다.

-

4월 XX일, 오후 4시쯤에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점검 및 실무진들에게 현장을 보여주기 위하여 기업 본사의 직원 분들이 방문하신다고 한다. 이전에는 1명만 방문하였지만, 이번에는 처음 방문하시는 2분이 동행하신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는 자질구레한 허례허식이나 의전은 당연히 필요 없다고 보고, 우리가 을도 아니니까 그럴 필요도 없다. 그냥 사람 대 사람, 직원 대 직원으로서 업무에 관해 이야기만 하면 된다. 

근데...

굳이 비유를 하자면 저기 '스타키 보청기'에 해당되는 위치가 우리 회사의 위치같은 느낌?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가? 내가 면접을 보러 올 때 회사의 첫인상에 대해 느낀 것이라면 '회사가 참 고개 중턱에 있네', '건물 찾기가 힘들겠네', '이 건물엔 대부업체가 왜 이리 많은 거지?'  '엘레베이터 참 느리다' '구내식당도 없는 건가' 등등... 아마 다른 분들이 방문하시더라도 그런 인상을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 대부 업체가 많다는 건 진짜임 ㅋㅋㅋㅋㅋ 1층에서 일본인 대부업체 대표가 대화 나누는 거 보고 신선함 느낌.

비품이 이리 저리 산개해 있고, 정리정돈이 안 된 모습을 차마 보일 수는 없는 것은 이해한다. 다만 업무 내용과는 다르게 지난 6개월동안 청소, 정리 정돈만 하고, 정리를 하고, 물건을 찾고... 그런 일만 했던 걸로 기억한다. 4월 XX일 역시 기존 사무실의 기강 잡기 시간이라도 되는 듯이 모든 부분을 싹 정리했다. 봄맞이 대청소라는 기분으로 일하면 조금 나았다. 청소나 정리 정돈을 싫어하는 건 또 아니니까. 평소에는 간식 비치도 없으면서 손님이 오실 때마다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온다. 간식이 당연하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평소에 갖춰 둔다면 좀 좋지 않나... 물론 그런 조달도 결국 우리의 몫이다.

하지만, 처음 수습 기간동안에는 수습이니 그렇겠거니 했는데 정규직이 된 이후에는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이 일만 계속되는게 맞나? 나는 그냥 안정적인 현 회사의 규모에서 1명이 추가된 것에 불가하고, 자잘한 기타 업무는 내가 떠맡게 되는 셈인가. 미몽에서 드디어 깨어나는 것인가! ㅋㅋㅋㅋㅋ 처음에는 정규직 전환이 됐다고, 당연한 수순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축하를 해줬는데 사실 여기서 바로 탈출하지 못하면 정말 끔찍한 경력만 쌓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경력기술서에 남길 수 있는 건 수치로도 나타낼 수 있는 성과, 뚜렷한 업적이 아니라 정말 누구라도 하루만 가르치면 할 수 있는 듯한 일이었으니까... 그런 건 경력기술서에 절대 써선 안 된다. 

내가 생각한 경력이라 함은,

실제 다녔던 회사의 채용 공고였고, 나도 이 공고를 보고 진입을 하게 됐다. 자세하게 서술이 되어있지는 않더라도 저런 분야로 전공을 했고 공부를 했으니 무슨 말인지 전부 알고, 신입이니 특별한 경험은 당연 없겠지만 적어도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있기에 지원을 한 셈이었다. 경력을 쌓는다면 그 역시 사용자 조사에 관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할 줄 알았다. 

근데 내가 실제로 내내 한 일은...

 

 

위 메시지는 얼마 전에도 계속 주고 받은 메시지 중 일부인데, 요약을 하자면 이런 일을 계속 하다가는 1년, 2년이 지나도 내가 경력 기술서에 남길 수 있는 것은 '다나와에서 최저가로 물건 찾기', '전화 돌리기', '중고 거래 전문가' 이런 것 따위만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들었다. 덕분에 본가에서는 쓸 일도 없던 당근마켓 뱃지는 좀 획득했다. 세상 누가 이런 걸 경력으로 남긴다는 말인가? 위 공고와 비교해보아도 전혀 상관없는 일이고, 출근 뒤에는 오늘은 어떤 잔잔바리 일이 떨어질지 약간의 긴장감만 유지하면 된다. 

망상을 좀 쪄 보자면, 내가 이직을 위해 2-3년의 근속 이후 면접을 보게 된다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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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관 : 글쓴이님의 경력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 다나와를 비롯한 가격 비교 플랫폼을 통해 프로젝트에 이용할 소품 등을 주로 찾았습니다. 최저가로 협상하는 것이 최우선의 주문사항이었기에 현금 결제, 대량 구매 등 갖은 수단을 이용하여 최대한 지출을 줄이고, 이용 후에는 당근 마켓, 중고 나라 등에 비품을 등록하여 중고 거래를 하였고, 9-6시가 아닌 밤이라 하더라도 연락을 받아 거래 약속을 맺어 손해를 보전하는 것이 제 담당이었습니다. 

면접관 : 네???

: (저도 속으로 '네????'를 외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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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는 방식도 체계가 없다. 예를 들어 정작 2-3주 전에 미리 찾아놓은 물건을 주문만 하면 되는 단계에서 '조금 더 좋은 사양으로 찾아보자'만 반복하시더니, 일이 닥칠 때가 와서는 '퀵 서비스로 배송하자'는 식으로 마무리가 된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작은 물건도 아니고 10kg가 넘는 화물 택배라면 퀵 서비스가 될 리가 없다. 현지 수령이라도 하라는데 그렇다고 내가 그걸 하겠냐... 할 리가 없다. 1주일 전에만 미리 주문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인데, 여기서는 '미리 해두는 사람'만 바보가 되는 구조로 일이 흘러간다. 미리 해봤자 항상 뒤집히고 바뀌기 마련이다. 그리고 물건 주문하는 일이 심오한 전문성을 요하거나, 이런 일도 아니다. 하다 못해 생산직으로서 물건 조립하는 것도 전문성이 있는 일이라 생각하는데, 이건 그냥 다나와를 이용해서 물건만 찾으면 되는 일이니까... 무엇보다 착불로 낸 내 사비는 언제 돌려주실 건지? 

살면서 퀵 이용하긴 이번이 처음이다.


만약 여기가 장인과 제자 관계처럼 도제식 시스템으로 이뤄지는 업계라면 처음에는 몇 년간 군일만 하더라도 아마 그러려니 했을 것이지만, 엄연히 컨설팅을 진행하는 회사라면 그에 맞게끔 기본적인 교육도 이뤄져야 하고, 매뉴얼도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처음 출근을 한 뒤 마주한 모니터는 새하얀 백지에 가까웠고, 인수인계 매뉴얼이나 절차도 없었으며, 따로 OJT/온보딩 절차 같은 것도 없었다고 보면 된다. 그냥 그때 그때 마주치는 일로 직접 습득한 셈. 

나도 여러 사례 찾아보면서 이런 절차라도 밟고 싶었는데...

뒤늦게 깨달은 것 같기도 하지만, 내 역할은 위 공고에 있는 업무를 차근차근 익히고 배워나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정말 물건 조달팀에 가까웠다. 내가 조달청이냐, 하하하...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이지만, 적어도 처음에는 참고 견디고, 나중에는 이런 일을 하겠거니 생각은 했는데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봐서 탈출하기로 결심을 내린 셈이다. 지금도 너무 마음을 잘 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28살, 29살, 30줄을 넘어가서도 디자인 분야에 관한 전문성을 쌓을 수는 없는 곳이라니... 
나는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발이 넓지도 않아 디자인에 관해서 정보를 구할 곳이 별로 없었고, 검색에 의존하는 성향이 굉장히 강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검색 아니면 어디서 정보를 구하겠는가. 특히 다른 업계와는 달리 디자인 분야는 작은 에이전시부터 시작해 포트폴리오를 보강해 나가고, 점프를 하는 방식이 관행(?)처럼 되어있고, 이 테크트리가 정석이라고 불리는 편이다. 나 역시도 그렇게 시작하겠거니, 했는데... 첫단추부터 잘못 꿴 것인가, 사실 유수의 정보를 찾아보면 보통 하는 말이 '눈을 낮추고 작은 곳부터 시작하라'는 말이 많다. 틀린 말은 절대 아니다. 큰 회사라 해서 근무 여건이 당연 좋은 것도 아니고, 작은 회사라 해서 근무 여건이 최악이라는 건 또 아니다. 다만 적어도 내가 기대한 일과는 다르게 잡무만 하는 건 참기가 어려웠다. 아르바이트라면 모르겠는데, 경력을 쌓기 위해 온 곳이니까. 

1이 넘으면 일자리가 더 많다는 뜻이고, 1보다 적으면 구직자가 더 많다는 것이다.
일본의 기업 문화를 이어받은 우리나라지만, 기업 간의 격차는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 구조는 정말 기이하다. 이전과는 다르게 원청이 되어 주는 대기업과 하청이 되어주는 기타 중소규모의 업체의 임금 규모, 복지 차원의 격차는 너무나도 커지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당연히 대기업에 준하지는 못하더라도 양질의 일자리를 찾을 테지만, 악화일로에 빠져 있는 고용 시장 속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의 구직 지표는 처참하다.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100명이라면 일자리는 40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위 표에서는 서울을 기준으로 보면 0.31, 구직자 100명 당 주어진 일자리는 31개인 셈이다. 전국 평균으로 보더라도 0.45이니까 55명은 낙오된다는 셈. 

그래서 '눈을 낮추고 작은 곳부터 시작하라'는 말이 가끔은 위선처럼 느껴진다. 
다녀본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쉽게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작은 곳'도 제대로 된 곳이어야지, 제대로 된 곳은 찾기가 어려울 걸... 또한 나 역시 그 작은 곳부터 시작해서 경력을 쌓자는 포부로 왔지만, 업무 분장 없이 이런 저런 일만 닥치는 대로 하는 업무 방식으로는 경력을 특별히 쌓고 인정받기도 당연히 어렵다. 열심히 노력한다면 점프할 수는 있겠지만, 회사에서 기회가 생기지 않으면 경력을 남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도 자존심이란 게 있었나보다. 이런 부끄러움은 본사, 그러니까 대기업의 직원 분들이 방문하실 때 느껴지는 것이었는데, 이 때에는 참 재미난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직원들에게는 항상 '~냐, 야, ~해줘.' 등의 반말로 대하는 대표님은, 외부 직원 분들이 방문하면 '하십시오' 체를 쓰시는데, 그 모습이 솔직히 말하자면 보통 가증스러운 것이 아니다. 외부 직원 분들께 반말을 하라는 건 당연 아니고! ㅋㅋㅋㅋㅋ 직원들도 똑같이 존칭을 쓰는게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알고보면 골수 유교맨이라 이런 예의 문제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들으면 들을 수록 영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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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까 경력 문제와 관련이 있는 부분인데, 대기업 직원 분들이 방문하신 뒤 회의를 하게 되면... 일단은 인상에서 나와 비슷한 또래이신 게 느껴지고, 보통 생각하는 포멀한 옷차림이 아니라 편안하고 캐주얼한 옷차림과 함께 전문적인 용어가 속사포처럼 나온다.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업무 소통이라는 건 저런 거구나, 추상적으로 이 부분, 저 부분 말하는 게 아니라 명확한 지칭을 하고... 

나는 시설 조작을 하고, 회의록만 작성하는 것이니 어버버하는 순간은 없었지만... 그냥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이지만, 출발선 자체가 애초에 다르구나. 전문성을 차차 갖추고 시작하는 인재와 전문성을 잃고 같은 일만 전전하는 신세는 나중에는 격차가 어마어마하겠구나, 그래서 첫 직장, 첫 시작 등등 그 '처음'이 엄청 중요한 거구나... 나는 순진한 걸 넘어서 너무 바보 같았다.  

나중에 직원 분들이 회의를 마치고 복귀하실 때에는 내가 마중을 나가게 됐는데, 대기업에 너무 환상을 가져서는 안되겠지만 방문하신 직원 분들이 매일 출근하시는 사옥과 다르게 여기는 너무 후줄근하겠군, 그런 재밌는 생각도 들었다. 입밖으로 꺼내지는 못하지만 속에서는 참 그런 면에서 부끄러웠다. 나를 향한 부끄러움이다. 전문성이 뭐 대수냐, 싶어도 적어도 1인분은 해야한다는 의무감은 있는 편인데 내가 하는 일은 대체 어느 부분에 가치를 둬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상품의 컨셉을 제안하고 개발하는 것도 아니고, 비주얼을 개선하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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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사실 모든게 자격지심이다. 방문하신 분들도 별 생각없이 그냥 업무 차원에서 외근을 나오신 셈이고, 필요한 부분만 점검하면 그만인 셈이다. 나도 주어진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근데 최선을 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열심히 하면 뭐하나, 결국 내가 남길 것은 '물건 찾기 전문가'에 불과한데... 6개월 동안의 근무 이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정말 이게 전부라서 어디에 말하기도 진짜 부끄럽다. 하지만 그럼 뭐하나, 사실인데. 

이상은 퇴사 직전 나에게 또 하나의 깨달음(...)과 현타를 준 하루를 그려낸 일이다. 물건 찾기, 중고 거래, 청소, 짐 싸기, 응대, 회의록 작성, 시설 정비 등... 의 일. 이 하루라면 6개월의 일을 하루로 축약할 수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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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투덜대야지, 어차피 마친 건 마친 것이다. 자기연민은 달콤하지만 독이 된다.

퇴사는 휴식을 위해서 선택한 것이 절대 아니다. 쉬고 싶다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다. 퇴사는 결국 부족한 공부 시간을 확보할 방법이다. 다년간의 방황을 바로 잡고 확실하게 하나만 바라볼 때인 것이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상투적인 말이 있지..., 원래는 병행을 생각하면서 했는데, 향후 스케줄을 바라보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될 것 같은 가능성이 보여서, 이거 정말 ㅈ되겠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그냥 후회 없는 선택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내 집에 왔으니, 조금은 싱그러운 흙내음을 맡으면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다른 진로로 점프할 때가 온 것이다. 일이 잘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사를 남기는 것은 아니더라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들은 우습게 보는 직업이라 할지라도 열심히 공부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이어트도 정말 열심히 할 때라는 걸 직감했다. 그 동안은 현실도피만 했다...)

 

마지막 회식, 양꼬치와 양갈비.

 

고시원도 이제는 안녕


얻은 것 

그냥 그럭저럭의 소득 

어떤 회사를 가야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에 관한 가치관

시험에 집중해야 할 동기 

비즈니스에서의 인간 관계

우물 안 개구리에서 빠져 나옴 

 

잃은 것

피부

건강

시간

아까운 생활비

 


- 이상 사무실에서 적은 수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