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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쓸데없이 길기만 한 리뷰

<오펜하이머>, 추천할 수 있는 영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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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인 내용 스포일러는 없되, 영화를 보고 느낀 점에 따른 영화 내용과 이야기 배경을 약간 언급할 수 있음

요약

나무위키에서 '매카시즘' '맨해튼 프로젝트' 등의 문서를 검색하고, 재밌게 읽을 수 있다면 추천!

시각적인 효과보다는 사운드와, 배우의 눈빛과 호소력 짙은 주름이 전해주는 메시지가 메인인 영화

예고편에서 익히 보여주는, 원자폭탄 실험 장면이 메인이 아님


태평양전쟁의 종식, 2차세계대전의 종식, 그리고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광복'을 확인한 8월 15일, 공교롭게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가 개봉됐다. 소재 자체가 원자폭탄의 개발 과정을 다루고 있으므로, 옆 나라에게는 참 예민한 소재. 이러한 내용을 어떻게 그렸을까 참 궁금했는데, 과학적인 내용으로 가득찬 전기 영화가 아니라, 정치극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자는 진실만을 바라봐야 할까?
과학자는 사상과 가치의 문제에서 완전히 독립적일 수 있을까?
어떤 지식의 응용에 따른 양심의 무게는 어느 정도여야만하는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따른 결과는 누구의 책임일까?
국가관과 윤리관, 나는 그 사이에서 무엇을 택해야하는가?
양립할 수는 없을까?

나는 결국 누구인가...?

과학은 자연의(자연에 대한) 물음에 답을 주고,
기술은 사람의 물음에 답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영화를 본 뒤 그 영화에 대한 인상을 조금이라도 더 잡아두고 싶어서 기록을 하는 건 오랜만인 것 같다. 특히 메시지가 좀 있거나, 호불호가 확실히 갈려 편하게는 볼 수 없는 영화에 대해서는 일부러 그러려고 하는 편이다. 안 그러면 나도 까먹어서 ㅋㅋㅋ!

대중적인 흥행을 충분히 거뒀던 <인터스텔라>, <다크 나이트> 등과는 다르게 대체로 놀란 감독의 영화는 <메멘토>, <테넷>처럼 불친절한 케이스도 많고, 두세번 음미해야만 이해가 조금이라도 가는 경우도 많다. 또 장르와 장르를 뛰어넘어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경향도 있고, <오펜하이머> 역시 확실히 그런 편이다. 스포일러 없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락영화라고는 볼 수 없고 ... 한 사람의 고뇌가 어떻게 갈라지는지에 대한 정치극을 다뤘다고 보면 되겠다. 즉 역사의 파도 앞에 놓인 거인의 어깨가 짊어진 무게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앞서 말한 <메멘토>, <테넷>등과 같이 복습을 해야만 이해가 가능한 영화는 절대 아니다.
난해하지는 않은데, 내용을 풀이하는 방식 자체가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누구나 아는 역사적 사실, (영조가 사도세자를 결국 죽였다는 걸 말한다고 스포일러는 아님)

· 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 중 독일과 일본이 결국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 핵개발이 있었기에 종전을 앞당길 수 있었다는 점
· 소련도 결국 핵 개발을 성공해 그 유명한 차르 봄바 등의 위력을 선보인 점

... 등을 중점으로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폭발은 예술이다! 를 외치는 영화도 아니고. 전쟁사 혹은 과학사에 대해 관심이 많다면 오펜하이머가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의 지휘자였다는 점은 들어봤을 수는 있지만, 그가 누군지 몰라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는 ‘일단’ 무리는 없다. 오히려 그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었을수록 어떤 유년 생활을 보냈는지, 그의 인생관은 어땠는지, 학자로서의 양심과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이념 사이에서의 고뇌를 더 잘 볼 수 있다. 피와 눈물을 생각하는 과학자에 대해서도 바라볼 수 있고...

전후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의 광풍, 너 빨갱이지?
매카시와 후버


다만, 세계대전 종식 전후에 대한 역사적인 맥락과 사실, 그리고 인물에 대한 약간의 배경지식이 영화에 대한 이입을 좀 더 이끌어낼 수 있다. 미국을 뒤덮은 매카시즘(‘빨갱이’ 색출 작업)의 발단, FBI 후버 국장의 영향력, 트루먼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역할, 고전역학의 질서와 상충될 수도 있는 발견이 나타난 현대과학계의 거두인 과학자들의 이름과 업적 및 가치관(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로렌스, 그 외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 등)에 대해 안다면 영화 자체를 좀 더 재밌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전질서의 상식과 위배되는 발견이 막 등장하던 시기라, 양자역학에 관련된 여러 개념어가 나오지만, 이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당연히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인물과 인물 사이의 갈등과 역사적 배경이 극의 중심이 되므로 이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대화가 그려내는 액션이라고 보면 될까. 대사 없이도 인물의 눈빛과 얼굴 주름이 던지는 메시지도 일품이다.

우수에 잠긴 눈빛이 매력적인 킬리안 머피, 아이언맨의 이미지를 벗어 던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완벽한 변신


놀란 감독의 시각적인 기교가 주로 드러나는 이전의 작품과 달리, 사운드와 배우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연기력이 관객의 집중도를 확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기승전결이 확실히 있는 통쾌한 오락성은 기대하지 않고 담백한 다큐멘터리처럼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따라서 관심사에 따라서는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을 영화는 아닐 수도 있겠다. 
흥행가도를 막 달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편...이라고, 개인적으로 느낌.
평단의 평이 좋은 것과 대중의 평은 다를 때가 많으니까.

전기 영화는 몇 안 봤지만 <이미테이션 게임>이나 <사랑에 대한 모든 것>과는 방향도 무게도 다르다고 볼 수 있다.

+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물리학은 자연과학의 '시(詩)'가 아닐까 싶다. 자연의 질서를 발견해 내고, 그 복잡한 질서를 아름답게 풀이해 나가는 점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이를 매끄러운 필치로 그려내는 시인과 그 역할이 비슷하지 않을지. 오펜하이머뿐 아니라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러 과학계의 거인들 모두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고뇌하는 과정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질서를 발견해 나가는 업적을 넘어서, '국가' 앞에 놓인 정치적 사명은 과학자들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시인은 그저 현상을 묘사하는 것에서 책임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