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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쓸데없이 길기만 한 리뷰

[장미의 이름] 지난 날의 장미들이 남긴 저마다의 기억과 향기들 - 1

이 글은 대학 재학 시절 작성한, <장미의 이름>의 원작인 소설과 각색된 영화를 비교 서술하는 내용입니다.
1편에서는 우선 <장미의 이름>을 읽고 생각한 점에 대해 정리해보기로 했습니다. 2편은 영화와 비교하는 내용입니다. 

컴퓨터에 묵혀두기에는 혹시 과제를 위해 방황하는 분이 있으시다면 약소하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까싶어 올립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들어가기에 앞서서... 

20세기 인문학의 근본,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 (1932 ~ 2016), 인문학계에서 큰 족적을 남겼지만, 우리 시대와 그렇게 거리가 먼 인물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2016년 작고하셨지만, 그가 남긴 향기는 여전히 수많은 학도들의 몸을 휘감싸고 있을 것이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지식 탐구, 다양한 저작 활동, 그리고 고리타분하다는 인상을 보여주는 인문학 각 분야와는 달리 재치있고 위트있는 특유의 화법을 통해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얻은 세계적인 대학자이다. 

보통 에코의 업적은 기호학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기호학 뿐만 아니라 고전 문학, 언어학, 철학, 미학 등 전반적인 인문학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남겼다. 대중에게는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등의 작품을 통해 문학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에코의 문학 세계는 본래 활동 영역인 인문학 저작물들의 재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 이래 무에서 유가 만들어지는 것은 없듯이, 방대한 세계관은 다양한 독서 경험과 배경 지식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의 특징은 사실은 사실로 남겨두되, 독자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는 특유의 재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후 소개할 <장미의 이름>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으로 유명한 <시학>의 후속인 2부가 과연 존재할 지에 관한 담론이 사건의 발단이 된다.

 
*<시학>은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연극' 중 비극에 대해 다루고 있다. 희극을 주로 다루고 있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과 같은 유형과는 대척점에 있지만, 비극만이 주고 있는 비장미, 운명론, 고유의 미학이 후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면 될 것이다. 따라서 <장미의 이름>에서는 '웃음'에 대해 다룰 것이라 예상되는 <시학>의 2편이 존재한다는 가정이 줄거리의 핵심이 된다. 

비극에 대해 다루는 시학 1편이 있다면, 2편도...?



다양한 지식의 세계와 그 통섭을 꿈꾼 움베르토 에코의 대표적인 작품, <장미의 이름>의 원작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지난 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적지 않은 분량을 자랑하는 책. 중세의 향기가 물씬...

노년의 수도사가 지난 날을 회상하며, 자칫 지나간 삶들에 대해 회한을 품고 있는 듯한 이 글귀.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이다. 소설의 첫 머리가 아닌 말미에 위치함으로써 약 1000페이지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과 서사를 함축하는 이 문장은 여전히 가슴 속에서 불타고 있다. 이 수도사가 말하는 ‘덧없는 이름’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에코가 생각하는 이 ‘덧없는 이름’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바는 무엇일까.

 

<장미의 이름>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소설이지만, 우리에게 ‘암흑시대’라는 오명으로 낯설게만 느껴지는 중세의 배경과 함께, 신학적인 논쟁이 주를 이루는 인물들의 대화, 그리고 그 속에 어우러진 고대 및 중세 철학사에 대한 개론적인 이해가 뒷받침되어야하기에 결코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은 아니었다. ‘오컴의 면도날’로 잘 알려진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당시에는 어느 지역의 출신이냐에 따라 이름을 지었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금촌댁 같은 느낌)을 모델로 삼은 듯한 스승 윌리엄, 그리고 그를 뒤따르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소설 속의 수기를 남긴 아드소. 그들은 멜크 수도원 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사건들을 파헤치게된다. <장미의 이름>을 단순히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로 바라보아도 좋다.

하지만 20세기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이 소설을 더욱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싶다면, 늘 그렇듯 소설 속에 나타난 시대문화적인 배경과 함께 더 나아가 신학적인 논쟁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웃음이란 과연 우리에게 해악인가?’에 관한 논쟁. 그리고 ‘이단의 보편성과 개별성’에 관한 논쟁. 서양사에서 결코 뗄 수 없는 그리스도교에 관한 견해들이 풍부하게 드러나있다. 철학사에 있어서는 영국의 경험론을 따르는 윌리엄 수도사, 그리고 플라톤의 철학과 합리론을 이어받은 전통적인 교부철학자의 모습을 보이는 호르헤 수도사의 대화를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중세가 그저 암흑의 시대가 아니라, 중세만의 고유성을 지닌채 새로운 사상을 끊임없이 탐구한 시대상을 엿볼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그저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대표적인 문구로 오해를 받지만, 이 말 속의 함의는 '철학이 뒷받침된 신학이라야 완성될 수 있다'라고 볼 수 있다.

*호르헤 수도사는 ... 이 분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기존 교부 철학과 경험론에 입각한 전개를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와 윌리엄 수사의 모습이 제법 비슷하다.


무엇보다 이 책 속에 나타난 모든 신학적인 논쟁과 당시의 생활상은 에코 스스로가 지어 낸 것이 아니라, 중세에 관해서는 최고의 권위자로 꼽히는 그인만큼 철저한 고증에 의해 묘사된 것이라는 점이다. 날카로운 분석과 고증과 함께 그의 상상력이 어우러진 부분 역시 단순히 고리타분한 내용을 넘어서 소설의 핵심 사건을 만들어주는 요소가 되었다. 소설의 끝에서 비로소 밝혀지는 살인사건의 동기는 수도원에서 가장 미궁에 휩싸인 공간, 장서관 속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 물론 이 책은 실존하지 않는다. 다만 <시학> 1권에서 비극을 논한 아리스토텔레스가 과연, 고대 그리스에서도 인기를 꾸준히 얻던 아리스토파네스와 같은 희극 작가를 보고도 희극에 대해 논하지 않았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집대성되어 전통적인 교부 철학 -앞서 말한 호르헤 수도사로 대표되는- 과는 다른 스콜라 철학의 정점으로 이어진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


<시학> 2권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 분명히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에코의 상상력 덕분에 비로소 이 <장미의 이름>이 나올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소설 속의 <시학> 2권은 불길과 함께 잿더미가 되어버리지만. 이와 함께 아직 어린 청년인 아드소의 성장담에 주목하는 것 역시 하나의 묘미이다. 수도사로서 평생 그리스도에게 봉사하며 세속적인 욕망에 이끌려서는 안되지만, 아드소는 한 순간의 욕망으로 인해 음욕을 품어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의 스승 윌리엄과 함께 아드소가 스스로  대해 고민하며 신학적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아드소 개인 그 자체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역시 이 소설의 깊이를 한층 더 굳히는 한 요소가 아닐까. <장미의 이름>에 대해 지레 겁을 먹었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이 소설이 담고있는 중세의 향기, 그리고 그 속에 녹아든 인물들의 지혜로운 모습,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뜻을 좇기보다는 탐욕적인 모습들, ‘인간이기에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덧없는 인간군상을 느낄 수 있었다.

아드소가 말한 ‘지난 날의 장미’는 그저 아드소 개인에게 있던 일화를 의미하는 것일까? 아직 우리에게 남은 편견으로 인해 오해받고 있는 ‘중세’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서양 문명의 근간이 된 그리스와 로마로 대표되는 고대 역사, 그리고 계몽주의자와 함께 민주주의의 단초를 마련한 근대와는 달리 중세가 품고있는 이미지는, 그저 종교를 위한 국가만 존재하며 고대 국가들이 보여준 문명의 발전에 뒤따르지 않는 퇴보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암흑시대’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최근들어 학계에서 재조명하고 있는 중세가 지닌 독특함 역시 서서히 알려지고 있다. 결코 모든 것이 퇴보된 시대가 아니라, 인문주의의 씨앗을 품으며 훗날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찬란한 중세 문화를 꽃피워낸 시대. 페트라르카와 같은 과거의 학자들에 의해 중세는 ‘르네상스’와는 단절된 ‘퇴보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지만, 역사는 칼로 자르듯 결코 단절될 수 없는 개념이다. ‘지난 날의 장미’가 ‘덧없는 이름’으로 남겨지는 아쉬움을 남겨서는 안되겠다.

요한 하위징아의 대표작. 이와 같이 중세의 고유성에 주목한 저작도 있다.


대표적인 중세학자로서 에코는 중세가 지닌 기존의 이미지를 타파하고 중세 그 자체로 역사적인, 철학사적인, 그리고 다른 분야 모두를 통틀어 그 나름대로의 의의를 지니고, 그 속에서 살아가던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비록 아드소는 ‘덧없는 이름’으로 묘사하며 수기를 마무리했지만, 이 ‘덧없는 이름’이 될 뻔한 수기를 에코가 다듬었기에 ‘장미의 이름’은 중세의 이름을 지닌 계절이 지나도 시들지 않고 우리에게 그 향과 여운을 남기고 있다.

 

2편에서 계속 ...